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민미협’20년사' 책으로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16. 00:08

지난 1985년 창립 이후 미술의 사회적 소통기능 회복과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밝히는 데 노력해온 (사)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회장 여운)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민미협 20년사 출판기념회’를 개최한다.

행사는 22일(화) 오후 5시부터 세종문화회관 세종홀(1층 소연회실)에서 열리는데, 심포지엄과 축사, 축하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1부 심포지엄의 사회는 『민미협 20년사』 이종률 편찬부위원장, ‘80년대 미술비평의 논리와 상황’에 대한 발제는 미술평론가 원동석이 맡았고, 이어 작가 박경훈과 독립큐레이터 전승보의 토론회가 진행된다.

2부 기념식과 출판기념회에서는 이종률 편찬부위원장의 경과보고에 이어, 민미협 여운 회장, 민미협 20년사 홍선웅 편찬위원장의 인사말이 있은 후,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 열린우리당 이부영 전 의장, 국회 문광위 이미경 위원장의 축사가 진행된다.

3,4부에서는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축하공연과 만찬이 준비될 예정이다.

민미협은 권력의 현실에 영합했던 제도미술의 양식에서 벗어나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라는 기치 아래 ‘민족미술협의회’로 1985년 창립했고, 현재는 총 19개의 지회,지부로 나뉘어져 활동하고 있다. 기관지 <민족미술>을 창간하였고, 과거에는 전시공간 ‘그림마당 민’을 개관하여 민중미술 진영의 저항거점을 마련하였다. 

또한 1987년 <고 박종철군 추모 반고문전>,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전>,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참여, <통일전>을 비롯한 <여성과 현실전>, <정치선전전>등 민중미술의 전시, 교육, 집회와 인권회복에 힘썼고, 당시 끊임없이 정치적 메시지를 생산해냈던 민중미술의 파급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컸다.

90년대 들어서는 미술의 공적개입을 확장하는 시도로 ‘공공미술'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기념조형물, 도시공공벽화에 대한 시도 등이 이루어졌다.

이번 ‘민미협 창립 20주년 기념식 및 『민미협 20년사』출판기념회’에 대한 문의는 전화(735-4111,2/ 399-1651,2)로 하면 된다.

 


        
        
              
            
            

지난 1985년 창립 이후 미술의 사회적 소통기능 회복과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밝히는 데 노력해온 (사)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회장 여운)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민미협 20년사 출판기념회’를 개최한다.

행사는 22일(화) 오후 5시부터 세종문화회관 세종홀(1층 소연회실)에서 열리는데, 심포지엄과 축사, 축하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1부 심포지엄의 사회는 『민미협 20년사』 이종률 편찬부위원장, ‘80년대 미술비평의 논리와 상황’에 대한 발제는 미술평론가 원동석이 맡았고, 이어 작가 박경훈과 독립큐레이터 전승보의 토론회가 진행된다.

2부 기념식과 출판기념회에서는 이종률 편찬부위원장의 경과보고에 이어, 민미협 여운 회장, 민미협 20년사 홍선웅 편찬위원장의 인사말이 있은 후,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 열린우리당 이부영 전 의장, 국회 문광위 이미경 위원장의 축사가 진행된다.

3,4부에서는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축하공연과 만찬이 준비될 예정이다.

민미협은 권력의 현실에 영합했던 제도미술의 양식에서 벗어나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라는 기치 아래 ‘민족미술협의회’로 1985년 창립했고, 현재는 총 19개의 지회,지부로 나뉘어져 활동하고 있다. 기관지 <민족미술>을 창간하였고, 과거에는 전시공간 ‘그림마당 민’을 개관하여 민중미술 진영의 저항거점을 마련하였다. 

또한 1987년 <고 박종철군 추모 반고문전>,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전>,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참여, <통일전>을 비롯한 <여성과 현실전>, <정치선전전>등 민중미술의 전시, 교육, 집회와 인권회복에 힘썼고, 당시 끊임없이 정치적 메시지를 생산해냈던 민중미술의 파급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컸다.

90년대 들어서는 미술의 공적개입을 확장하는 시도로 ‘공공미술'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기념조형물, 도시공공벽화에 대한 시도 등이 이루어졌다.

이번 ‘민미협 창립 20주년 기념식 및 『민미협 20년사』출판기념회’에 대한 문의는 전화(735-4111,2/ 399-1651,2)로 하면 된다.

 

 


        
        


        

 

 


[한겨레] 1980~90년대 민중미술의 본산이던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대표 여운)가 창립 20돌을 맞아 <민미협 20년사>를 냈다.


400여 쪽 분량의 이 책은 80년대 치열하게 일어났던 한국 리얼리즘 참여미술의 기록 자료집 성격을 지닌다. 민미협 회원들이 86년 생긴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을 본거지 삼아 군사정권의 폭압에 맞서며 벌였던 생생한 현장 전시와 투쟁의 기억들이 담겼다. 20대의 힘 전, 반고문전 같은 ‘탄압의 추억’과 연관된 80년대 저항전들의 생생한 기록이 책 곳곳에 등장한다.


20년사라지만 자료집의 주된 시간대는 대략 10년쯤이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 중반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이 솔솔 불어오던 90년대 초까지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새 계보를 만들었던 시간들 중심이다. 물론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또다른 10년사는 현재 단체의 침체상을 반증하듯 옹색한 구석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창립부터 지금까지 주요 사건과 행사, 보도물 등을 망라한 ‘사진으로 보는 민미협 20년’, 민미협 20년 약사, 장르로 본 민미협과 미술운동, 전현직 회원들의 회고기인 ‘나와 민미협’, 연표, 선언문·강령 등이 졸가리를 이룬다. 손장섭, 주재환, 신학철씨 등 초창기 대표들과의 대담, 김정헌·민정기·유홍준씨의 회고담 등도 들어있다. 편찬위원장은 판화가 홍선웅씨가 맡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미술의 사회적 소통기능을 회복하고 이 땅의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밝혀온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가 올해로 20돌을 맞았다. 11월 22일 오후 5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는 민미협 창립 20주년을 맞아 ‘민미협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민미협 20년사』출판기념회를 겸한 이날 기념식은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유홍준 문화재청장, 김용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오용록 한국민족음악인협회 회장,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미경 문화관광위원장,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주요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1부 심포지움에서는 원동석 미술평론가의 ‘80년대 미술비평의 논리와 상황’이라는 주제 발표에 이어 작가 박경훈과 전승보 독립큐레이터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종률 『민미협 20년사』 편찬부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2부 행사는 민미협의 지난 20년을 돌아보는 ‘경과 보고’로 시작했다. 각 지역 미술운동의 출발에서부터 ‘현실과 발언’과 민미협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서울미술공동체의 결성, 《20대의 힘》전 사건, 판화가 오윤의 별세, 신학철의 〈모내기〉 사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민중미술 15년전》을 거쳐 『민미협 20년사』가 발간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슬라이드 화면을 통해 살펴보는 동안 참석한 민미협 회원들은 깊은 감회를 나누어 갖었다.

이어서 여운 민미협 회장과 홍선웅 『민미협 20년사』 편찬위원장의 인사말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이미경 문화관광위원장,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원,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축사가 펼쳐졌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축사를 통해 “민미협 20년 역사를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현재 민미협 활동에 대한 질타와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에 대해 요구하였다. 특히 그는 “현실이 변하긴 뭐가 변했다는 거냐”면서 “주저앉지 말”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이미경 문화관광위원장은 “지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과정에서 만약 민미협이 없었다면 얼마나 큰 손실이었을까 생각한다”면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민미협이 추구했던 그 시대의 아픔과 예술가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여전히 많이 있다”며, 앞으로의 활발한 활동을 부탁했다. 더불어 “광주 망월동 거리에 민미협 회원들의 갤러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80년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던 예술인이라면,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들의 아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우리에게는 그런 자랑스런 역사가 면면히 흘러 왔다”고 축사를 대신했다. 아울러 “우리의 작업이 끝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금부터 깊이를 더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그 결절점을 향해 지금도 계속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자신의 이력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민미협 공동대표”라고 운을 뗀 뒤, “우리가 현재 처한 고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은 같은데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변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지금은 어떤 것을 지향해 나가야 할지 민미협의 한 사람으로서 고민할 것”을 약속했다.

3부에서는 가수 정태춘의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그는 “20년 동안 민미협 여러분과 연대하여 활동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축하의 말과 함께 <간첩 이철진 동무에게>, <92년 장마, 종로에서>, <황토강>을 열창했다.

 

민미협은 권력의 현실에 영합했던 제도미술의 양식에서 벗어나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라는 기치 아래 1985년 창립했다.

“민족미술을 지향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창조와 수용의 공감 영역을 실천하고 확산하려는 의지를 널리 표명한다”, “해방 이후 제도 미술권이 벌여온 갖가지 억압적이고 장애적인 요인을 극복하여 민주적 삶에 기여할 것을 믿으며 이를 다짐한다”는 창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출발한 민미협은 현재 강원, 인천, 서울, 수원, 충남, 충북, 충주, 대구경북, 상주, 울산, 거창, 경남, 부산, 전북, 전남, 목포, 여수, 영광, 제주 등에 걸쳐 모두 19개의 지회 지부를 두고 있다.

기관지 <민족미술>을 창간하였고, 현재의 비영리 전시공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그림마당 민’을 개관하여 민중미술 진영의 저항거점을 마련하였다. 또한 1987년 《고 박종철군 추모 반고문전》, 1994년 《민중미술 15년전》,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정치선전전》 등 활발한 전시 활동을 통해 민중미술을 알리고 인권회복에 힘써 왔다.

90년대 들어서는 미술의 공적개입을 확장하는 의미로 ‘공공미술'을 시도하여 기념조형물, 도시공공벽화 분야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이 창립 20주기를 맞았다. 군사 정권에 맞서 미술로 싸웠던 민미협은 한국미술사에서 민중미술을 하나의 견고한 흐름으로 만들어 놓았다. 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민미협의 그림이 있었다. 민미협 창립 20년의 그 고단하지만 보람 있는 길을 김용태 초대 사무국장에게 들어보았다. 민미협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편집자

 
먼저 '현실과발언' 동인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현실과발언(이하 현발) 창립이 79년도인가 그래. 멤버가 누군가 하니, 원동석, 성완경, 최민, 윤범모 같은 평론가하고, 화가들이야. 화가들은 대충 알테고. 처음 시작할 때는, 관철동에 주재환 선생하고 사무실이 있었다고. 그런데 미술판이 이래 가지곤 안되겠다는 얘기가 많았어. 그 당시론 참으로 암담한 시대였잖아. 유신 말기니까. 미술에서도 모더니즘이 너무 득세를 했어. 성완경, 최민 같은 경우는 불란서에서 나름대로 이론적으로 무장을 해왔던 친구들인데, 이게 사회에 대해 미술가가 발언을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한 거야. 이 사회에 대해서 뭔가 도발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했지. 그리고 당시 상황도 사회과학적, 인문학적으로 우리가 운동성이 강한 편이었지.

 우리 주변엔 문인들이 있고 하니까 자극이 된 거지. 자극을 받아서 그야말로 미술가들이 사회에 대해, 이 암울한 시대에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그냥 묵묵부답하게 풍경이나 그리고 누드나 그리고 해서 되겠느냐. 외국도 시대적 상황에 맞는 그림이 나오는데 이 사회는 왜 그러지 못했는지 고민을 한 거지. 그래서 같이 모여 여러 얘기를 했지. 작품에 대한 얘기,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미술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등등 얘기를 많이 했어. 그러다 이러면 안 되겠다, 화가들이 무슨 그룹을 하나 만들자. 그래서 시작된 거야.
 
우리가 자주 만나 토론을 했어. 일주일에 한번씩 발표도 하고, 대략 내가 앞으로 그림 이렇게 그리겠다 그러면 괜찮겠다, 그려보라고 의욕을 북돋워주고, 그래서 그려오면 또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비판했지. 임옥상이 욕 제일 많이 먹었어.(웃음) 이게 그림이냐 하곤 했지. 그래도 누구하나 그 부분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어. 난 그런 거 보면 우리 현발이 상당히 진취적이고, 상당히 올바른 곳이라고 생각해.

당시 얼마나 자주 모이셨나?

뭐 매일 만났어. 그때가 박정희 막판일 땐데, 상당히 재미있었지. 한 예로 10.26때인가, 그 날 우리가 청진동 중국집에 모였어. 그때 대학 쫓겨나서 룸펜생활 하시던 김윤수 선생이 오신 거야. 우리가 모여 있으니까, 그 당시는 뭐 7-8명 모여 있어도 안 됐거든. 그땐 모이면 신고해야 돼. 김윤수 선생이 “너네들 죽을려고 환장했냐? 가라. 다 집에 가라.”고 하셨지.(웃음) 사실 현발 뒤엔 김윤수 선생이 계셨지.
 
5.18이 발생한 그 해에 창립대회를 했지, 아마. 미술회관에서 전시를 하는데, 옛날엔 검열을 했잖아. 심사위원들이 우리 이름 몇몇을 봐서는 괜찮겠다고 했는데, 이게 그림이 전시되는 순간부터 비상이 걸린 거야. 이대, 홍대, 서울대 이거 뭐 전부 선생들 와서 난리가 난 거야. 미술회관 같은 보수적인 단체에서 이런 그림들을 신청해 받아 놨으니. 지금도 웃기는 게 전시회를 방해하려고 전기를 다 꺼버렸어. 미술회관 전기를 다 꺼 버려서 사람들이 촛불로 그림을 봤어. 그게 촛불전시라는 거야. (웃음)

 

당시 주로 그리시던 주제와 방식은 어떤 것이었나?

내가 생각하기엔, 당시엔 그림을 잘 그린다, 못 그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 비판적인 것을 그리는가 아닌가가 더 중요했어. 내가 했던 작품들이 꽤 있었어. 지금 다 없어졌는데, 꼴라주 작품들이 많았지. 다 풍자였어. 6.25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82년인가, 83년에 준비하면서 좀 다른 방식을 고민했어. 원래 그림 하는 사람들은 사진에 관심이 많은데, 당시 나는 몇 장의 사진을 보고, 좀 다른 방식을 떠올렸지. 그래서 사진 수집에 들어갔어. 당시 동두천 일대를 뒤진 거지. 사진 찍어놓고 안 찾아가는 사람들 있잖아. 그걸 몇 푼 주고 산다고 하면, 옛날 거 안 찾아간 거, 그걸 다 꺼내 준다고. 난 그걸로 그림을 끝냈지. 처음에는 이게 그림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생겼어. 거의 꼴라준데, 그게 요즘 다 유행하는 거지. 어떻게 보면, 내가 첨단을 간 거야. 그 당시 사진을 모은 게 조그마한 것부터 큰 것까지 한 800장 모았을 거야. 

민미협 초대 사무국장을 하시면서 창립 과정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 같은데, 창립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그때 초대 사무국장을 내가 했고, 손장섭 씨가 대표를 했지. 그 당시에는 대표직 맡으면 곧바로 감옥 들어가는 거야. 손장섭 씨를 꼬시는데, 이대 앞에서 없는 돈 모아서 돼지껍데기 먹으면서, 형이 하면 내가 사무국장 할 테니까 하라고 꼬셨지, 이 양반이 며칠을 고민을 하다가 승낙을 한 거야. 그렇게 하고 결성식 하기는 했어.

근데 사무실 돈 가지고는 운영이 안되니까 우리가 화랑을 하나 만들자고 했지. 그게 ‘그림마당 민’이야. 회원들한테 작품들 가져와라 해서 기금마련展’ 했어. 그게 처음으로 하는 ‘기금마련展’이 되는 거야. 그때 우리 민미협이 ‘그림마당 민’을 만들기 위해 작가들한테 그림을 다 공짜로 걷었지. 그때 지하 형은, 원래 그 양반이 화가 되는 게 꿈이라고, 그림 잘 그려, 그 양반이 한 댓 점, 화가들한테 보란듯이 갖고 왔지. 그렇게 그림 판 돈으로‘그림마당 민’을 마련한 거야.
 
근데 ‘민’자, 그때는 ‘민’자를 못 썼어. 민중이라는 ‘민’자도 못 썼어. 왜 ‘민’이냐는거야. 그래서 국민의 '민'이라고 했더니 역시 안 된다는 거야. 대공과 사람들이 매일 와. 개관식 할 때도 그림 이상한 것 같으면 매일 와서 잔소리하는 거야, 트집 잡고. 그래서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자, 그래서 민혜숙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한테 반장해라 그랬지. 인사동의 수도약국 옆에, 지하에 있었어. ‘그림마당 민’은 그야말로 민중미술의 요지야.

 

 

민미협 활동을 하면서 많이 힘드셨겠지만, 특히 어려웠던 점을 든다면?

내가 벌린 일이니까 감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돈 문제가 힘들었지. 당시 회비 잘 안 걷히고, 어디 가서 돈 구해오는 게 제일 힘들지. 선배들한테 돈 구해서 봉급 주고 했지. 그래도, 아주 즐거웠어. 나는 어쨌든 간에 우리 미술인들이 깨어나고 젊은 후학들이 상당히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는 것을 제공했다는 것, 선배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림으로서는 좋은 그림들을 잘 그리지는 못했는데, 그림으로써 사회현상을 이해했다는 것이 기뻐. 민미협이 창립되면서 최민화 같은 모더니스트 작가도 들어왔지.


민미협 활동을 하면서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으시다면?

글쎄 당시 故박종철 사건이 생각나네. 남양동 근처에서 죽고 난 뒤에 우리가 바로 '반고문展'을 기획했어. 발칵 뒤집혔지. 그야말로 고문에 관한 그림의 형태가,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린 학생이 고문에 의해 죽었다’ 라는, 그런 제목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어. 더 이상 고문이 없는 전시를 하자고 해서 기획했지. 당연히 안기부에서 난리가 났어. 전시에서 무슨 고문을 반대하고 하니까. 근데 재밌는 것은 우리를 못 잡아가는 거야. 화가들 잘못 건드려놓으면 사회적 여론이 악화된다는 것 때문에 경찰서 가서 조사는 여러 번 받았지만 잡혀가지는 않았어.

민미협이 사회변혁 운동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민미협이 중요한 거는 여타 운동단체에 자금을 확보해 줬다는 거야. 종자돈을 마련해줬는데, 민미협이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 거야. 당시 그렇게 어려운 시대에 여러 단체가 생기면서 힘들어 할 때, 그야말로 흔쾌히 그림을 제공했어. 뭐 어차피 안 팔릴 그림이니까 내줬지(웃음). 전교조, 전노협이 건설 될 때, 기금마련전을 하는 거지. 전교조 같은 경우는 쫓겨난 선생이 있는가 하면 학교에 있는 선생도 있었지. 자기는 운동에 참여는 하지 못하지만 판화 같은 거 조금은 사준다고. 그렇게 팔았지. 전노협도 마찬가지야. 그림을 빙자한 운동권의 자금책이 민미협이었어.

그때 그림 파는데 해설을 한 사람이 유홍준이야. 평론가니까 입심이 세잖아. 내가 “오늘 와서, 판매 일 좀 해라”고 자주 부탁했지. 그때 유홍준이 계간 미술 기자일 때였어. 각 그림들의 장점을 참 잘 설명했지. 그때 유홍준이 말 듣고 그림 산 사람들 돈 많이 번 거야. 이제는 많이 올랐으니. 

마지막으로 민미협 20주년을 맞아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치열성이 없으면 민미협의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 시대적인 정신을 작가들이 최선의 의식을 하고 그래야 되는데 너무 안주돼 있는 듯한 느낌, 그게 참 안타까워. 아직도 분단돼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치열한 부분이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 그래서 내가 민미협의 새로운 식구들 보면 좀 치열하게 살아가자고 하기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