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예술
그림과 예술
삶의 즐거움은 직업(사냥)을 떠나서, 당연히 놀이의 증가에 있겠다.
또한 삶의 깊이는 예술의 증가에 있겠다.
'나'만 삶의 깊이에 즐거움을 갖는 것은 예술이 될 수 없고 놀이이다.
혹은, 求道이다.
'나'를 찾는 이 놀이의 깊이는 즉, 축척된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냥 '나'로 끝나면 滅이지만,
이 '나'가 '너'를 만날 때 예술이 된다.
藝術은 '너'에게 의지하는 모든 순간들이다. '나'의 축척됨이 없어도...
'나'의 끝의 이미지인 解脫(작품)로 '너'에게 보시하는 것은
불교라는 조직의 일이다. 이와같이,
본다는 형식으로서 그림을 시대에 맞게 조율시켜 놓는다는 것이
지금의 그림조직의 모습이다.
그런데 보는 일로서의 그림(놀이)은 불교조직 처럼 어떠한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림이라는 본분을 충분히 소비하고 있는가?
보여줄 수 있다는 사제성이 너무 강해져서 그 권력(조직)으로 묘한 經濟(상품)가 되거나,
'유리알유희'로 바벨탑만을 쌓는 것은 아닌가?
약속된 언어와는 다른, 그림이라는 언어놀이는
누구나가 직접 그려서 소비되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보는 일 이전에 자신이 직접 그리는 놀이이다.
자신이 직접 그려가는 순간에 그림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문자보다 빠른 효과로서 모든 기술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대를 표현하는 視覺의 場으로서의 그림은,
그림이 수단이 된 이야기이지 그림의 본질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그림은 '찾기'와 '찾을 수 없음'의 역사였다.
그 과정에 많은 즐거움의 가능성과 재료가 축적 되었다.
이제 그림은 미학적 자살(많이 시도된 바 있음)을 통해서라도
누구나가 직접 그릴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그림조직이 '나'라는 놀이를 벗어나서 藝術이 되는 길이다.
종교의 조직처럼 보여주는 일에 집착해서,
그림에 美的인 상과 하를 두는 것은
그림이 그냥 '나'를 위한 고급놀이로만 끝나는 일이고,
'나'를 위해 '너'를 無力化시켜 놀이를 직업화(우상화)하는 일이고,
藝術을 도용한 인류의 죄악이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놀이로서 平等되게 하는 귀중한 약속이기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림이 보여줌(작품)으로서 찾는 갈망은
꽃밭을 지나가는 '나'의 해탈(직업)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나'를 떠난,
예술은 모든 직업이 '너'를 찾는 순간이다.
직업(작가)이 '너'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藝術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림으로 '나는 할수 있고, 나는 볼 수 있다'라고 우기지만,
작품이 예술이 되는 것은 소문뿐이지 거의 불가능 하다.
그러나 그림은 원래 그 몸이 가볍기에 예술을 실험하는 좋은 터전이다.
보는 그림에서 직접 그리는 그림으로,
그림 그 자체를 '너'에게 돌려주려는 운동(화실展)이
藝術에 근접하려는 그림조직(문화)의 바른 자세라고 믿는다.
어느 직업도 조직화 되어 예술의 감동을 맛보게 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림(자유언어)이라는 어린이 같은 것을 갖고 있는 畵壇이
先驗的인 절실함을 찾아,
'너'를 만나는 기쁨으로 조건(미학적이든, 경제적이든) 없이,
그 누추한 화실門을 열기 바란다.
(다음카페:화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