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김영식 <꿈의 미술!> 세계미술사를 다시 쓴다 - 정 효료수의 2005년 첫 글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10. 01:11

김영식 <꿈의 미술!> 세계미술사를 다시 쓴다 - 정 효료수의 2005년 첫 글


※피곤하다. 교정을 봐야 하는데 그냥 올린다. 올라인은 그게 좋다. 만남은 늘 올수 있다. 나의 글을 내일 다시 만나면 미안하다 사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옷에 밥풀이나 티끌묻은 건 털어주어야지
  
김영식 <꿈의 미술!> 세계미술사를 다시 쓴다

                                                  정 효료수


김영식의 그림을 무아의 그림이라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 꿈의 미술이라 단언했었다.  
피카소가 한없이 갈망한 무아의 그림세계. 그 그림이 꿈의 미술이 아닐까. 피카소가 살아 돌아와 김영식그림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김영식은 피카소의 부분부분을 몇 차례 만났다. 부지런하게 세상을 돌아보는 그는 세계에 이름난 그림이나 미술품에 대한 궁금증도 많아 직접 확인하고 즐기려함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늘 생각하는 사람, 늘 착상을 메모하는 사람, 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그는 잠시도 쉬질 않는다. 술도 담배도 하지 못하는 그는 모순에 취하지도 허영에 취하지도 못한다고 할까. 그는 꿈을 꾸고 있는 이성이다. 그의 미술이 꿈이 되기까지 그는 세상의 모든 걸 사랑하려 발버둥쳤다. 그는 실현했다. 미술이 꿈이 되고, 꿈이 미술이 되는 현실을 만들었다.
피카소보다 더 쉬운 그림 그리고 더 어리석도록 심오한 그림 그게 김영식의 <꿈의 미술>이다. 뼈 녹을 입시미술부터가 이미 서양석고에 신체가 마비된 미술길이 대학에서 서양미술사에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화단은 꿈의 미술에 반신반의한다. 아니 이해가 도저히 안 될 수밖에 없다. 줄기세포에서 자란 장기로 대처하며 유학으로 갈아치운 인조인간들이 어찌 꿈의 미술을 생각이나 하랴.
그래서 꿈의 미술은 현실에서 부서지거나 날아가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김영식의 미술은 미술이란 표현을 하는 자들로 봐서는 분명 꿈으로 끝나야할 환영이지만 생활에 찌들어야하는 현대문명 앞에선 위대하게 살아 숨쉬며 미소하고 아기처럼 정이 든다. 물론 미술인은 꿈을 만들기 위해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꿈은 만들어지질 않는다. 꿈은 현실로 돌아오고 자신의 미술은 그냥 그림이나 형상의 착각일 따름이었다. 언제나 꿈이 되는 미술을 그리도 갈망하며 순교되길 바랐지만 순교할 껀덕지를 찾지 못하고 결국 냉혹한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게 한국미술 아니 세계미술의 현주소다.

한국에서 꿈을 먹다간 화가는 몇이나 될까. 세계 미술에는 또 얼마나 될까
꿈의 미술은 누가 할까? 잠을 자면서도 일을 할 수 있을까. 잠을 깨면 잠이 아니다
꿈의 미술은 무얼까
몽정이 신체의 현실이라면 꿈의 미술은 미술의 다다르고픈 경지가 꿈의 세계는 아닐는지. 김영식은 미술을 그리지 않는다. 그의 미술을 보면 ‘만들어져 버렸구나’ 라는 게 맞다. 그의 미술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게 아닌 현재에서 바로 과거로 가 버린다. 참 이상하다.  바로 완성이 되어 버린다. 보통의 미술은 완성이 아닌 완성을 위해 계속한다. 그 계속이 늘 미완이며 늘 현재일 뿐이며 어느날 그림의 완성은 곧 급격하게 자신도 함께 과거로 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곧 그림과 미술놀이는 거의 조화(造花)로 굳어진다.
사람들은 조화 앞에서 경의를 표한다. 조화는 변화가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고급상품의 가치를 지니기 쉽다. 즉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미술품은 부동산의 가치로 잘만 고르면 손해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꿈의 미술 김영식
김영식은 있는 것을 그리는 것도 없는 것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김영식은 그린다. 무엇을 그리나. 꿈을 그린다. 다른 사람도 그리질 않는가. 물론 그린다. 그러나 그들은 꿈을 그릴 수가 없다.
꿈은 꿀 수는 있어도 꿈은 그림으로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화가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꿈의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잃었기 때문이다. 설령 꿈의 동굴로 들어갔었다고 해도 그 현상을 부정하고 파괴해 버릴 것이다.
그래! 미아(迷兒)들의 미술, 그 미아들의 무리가 되어 휩쓸려 다닌다. 그러다 김영식 꿈의 미술을 보게 된다. 국화빵처럼 찍어낸 꿈과는 다른 꿈을 보면서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아니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김영식의 미술이 꿈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부정한다. 아이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 것을 빼앗지 않는다. 아이들의 주머니나 가방에 수십만 원 아니 십만 원만 있어도 돈독이 오른 어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착취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특히 돈 맛을 알수록 더욱 악랄한 방법을 써서 빼앗을 것이다.
기존의 많은 미술인은 김영식의 미술을 어떤 방법으로든 부정하고플 테다. 세상에 미술이란 이름을 달고 태어나는 자는 다 김영식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 생각한다. 그 다음 그들은 할 짓이 없다. 그들은 애늙은이가 되었다. 그들 미술은 남녀(男女)도, 사제(師弟)도 다 늙고 허물허물 뭉기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꿈의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지만 절대 참회(懺悔)란 없다. 그들은 꿈의 세계가 없다고 말한다. 꿈의 미술을 말하거나 그러한 미술이 존재할 수 있다 고하면 비정상이라 한다.  
꿈의 미술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들이 사장되기 때문이다. 그림 하는 자들은 글에 환장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미술이 정당화는 그것 뿐 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공상이다 즉 아이들에게 미래는 꿈이다. 젊은 날 깨달음과 의식이 없이 자란 미래는 끝없이 오르막을 오르는 것이다. 올라도 올라가도 힘이 붙이는 게 미래임은 뻔하다. 미술대학이나 화가들은 아이들에게 거의 꿈을 주지 못했다. 아니 아이들의 꿈을  착취하고 갉아먹어 버린 현주소가 오늘의 미술교육일지 모른다. 한국의 미술대학은 눈치만 가르쳤다 그래서 삭았다. 인간다운 미술을 가르칠 능력은 없어도 눈치미술은 잘 가르쳤기 때문이다. 미술은 위대하게 평균화가 되었다.
김영식을 꿈을 그리는 화가다.
김영식의 그림은 어른에게 꿈을 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꿈을 잃는 거라면 김영식의 미술을 인정하고나면 어른이 되어도 꿈을 잃지 않고 사는 방법을 알게 된다. 미술에 박사가 아닌 사람들은 김영식 그림을 좋아한다.
김영식의 그림을 한 점이라도 사 보아라. 그리고 벽에 걸어두고 보아라. 그러면 보이리라. 자신에게도 너무 아름다운 꿈이 존재함을
꿈은 잃지 말아야 한다. 꿈을 잃는 순간부터 불안은 급격하게 증가한다.
불안에 떠는 미술 짓이 아름다워야 할 미술을 편 가르기 한다. 구상과 추상으로 , 구상과 비구상으로, 그러면서 이상하게 덜 만들어진 반추상으로 한국미술협회의 어느 씨레배기들이 만들어낸 용어인지는 몰라도 그게 무슨 진리처럼 통용되는 곳이 미술이다. 미술은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선천성 소아마비도 많고 저능아도 많다.
어찌 보면 그 이상한 용어들이 당연할지 모른다. 미술이니까. 물에 물 타도 술에 술 타도 다 미술이니까?
소설에서 구상소설 비구상소설이라고 구분 지을 멍청이는 없다. 언어란 그 자체가 문학이다. 문학에도 없는 용어가 이상하게 배란되어 쏟아지는 미술세계는 늘 사생아의 놀이터다.
사실 미술에 있어 가장 큰 비린 정의가 바로 구상과 비구상으로 가른 사건이다. 미술의 실존을 가장 예리하게 바라본 성찰이다. 인간은 환영에 사로 잡혀 산다. 사람 속에는 신(神)이 있다. 그 신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동거하는 것이다.
현존해야하는 미술은 발명과 마찬가지다. 당대에서 한 사람이 발명 혹은 발견하면 그 다음 사람들은 복제 재생산의 의미 외에는 무엇이 더 있는가. 공급의 의미는 이미 네트워크란 용어만큼이나 고도화되게 발전해 있으니까.
김영식 꿈의 미술은 발명도 못되며 발견도 못된다. 김영식의 미술은 우리에게 흔하게 있어 왔으며 우리가 지겹도록 접해온 자궁(子宮)이기 때문이다. 연어가 회귀하듯 세월이 가면 그곳에 가야만 하듯 김영식 미술이 곧 인간의 미술이기 때문이다.
미술은 신비한 게 아니다. 인간이 신비하기 때문에 미술이 신비하게 비쳐지는 것이다. 인간의 신비함을 사랑함을 갖지 못한 자들이 미술을 신비하게 하겠다는 그 자체가 가소로운 것이다.  
김영식의 미술은 발명도 발견도 아니다. 미술의 가장 원시성을 지닌 살아있는 화석(化石)이기 때문이다.
발견을 하건 발명을 하건 연속된 미술로 살아남으려면 주위가 있어야 한다. 김영식 꿈의 미술도 혼자 살아 혼자 꿈꾸는 미술을 할 수만은 없다. 미술도 노화(老化)는 온다. 배부름으로 꿈에 부풀었던 청춘이 간 뒤에 기름진 몸으로 예술 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좋아하는, 상대가 원하는 그림을 한번도 생각하며 그린 적이 없는 꿈의 화가 김영식이 자신의 그림이 자꾸 팔려나감에 불안해한다. 이제는 집에 남아 있을 그림이 좀 있으면 좋겠다고 푸념한다. 자신의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역시 꿈은 한번이다. 한번의 꿈으로 한 작품이 나온다는 게 결코 쉬운 건 아니다. 바로 김영식은 한번의 꿈으로 두개의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천재성이 있다. 너무도 쉬운 그림, 너무도 편한 그림, 너무도 화려한 그림, 너무도 옥심이 없는 그림을 세상에 내어 놓는 김영식은 분명 세계미술사를 다시 써야할 천재다.
꿈의 미술! 세계미술사를 다시 쓴다. 어젯밤 꿈에서 나는 그렇게 썼다.
인간이면 누구나 꿈이 있다. 그 꿈을 키워줄 불씨가 있다면 김영식미술에서 찾는 방법이 있으리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