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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대구바닥의 미술 그리고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17.

국주가 어느새 여자중학교 1학년이다. 예쁜 교복을 입고 예비처녀 티를 낸다. 4년전쯤인가
국주가 10살쯤 되었었나.
원체 어리지만 일단 화단의 끄트머리에 이름표를 달았을 때다 (시간 개념이 정확하질 못하여 가끔 행설수설한 예가 있다. 김윤수 큰선생을 뵈올 때 그 날은 국주가 7살 정도였지 싶다 왜냐면 국주가 아홉살에 전시하기 전이니까 말이다)
김윤수(국립현대미술관장) 큰선생과 도곡 김태정(서울서예비엔날레위원장)교수의 저녁식사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웬만하여 사람 만남을 승낙을 아니하시는 큰선생께서 여러 차례 나의 간곡한 부탁에 이루어진 소중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국주는 두 분에게 엎어지듯 두 번 큰절을 올렸다.
왜 큰절을 올려야하는지는 몰라도 아빠가 그렇게 하라니까 하였을 테다.
그러나 먼 훗날 국주(國主)가 제대로 된 미술가가 된다면 그 날이 참 자랑스러우리라

미술에서 목숨을 내 놓고 정말 믿을 수 있는 한 분을 거명하라면
나는 열 번을 다 꼭 같은 답으로 김윤수선생을 택하리라
얼음은 온도가 없고, 명검(名劍)은 날이 없다.  
알다시피 큰선생은 사람을 절대 함부로 알려고 하질 않으신다
어쩌면 정(情)이 너무 없으시다.
선생을 모르는 사람들은 선생의 얼음과 명검 같은 직선적(直線的) 빛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명성만큼 자신에게 뭔가 이익이 되질 않겠나 하고 기대를 품었다가
자신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음에 금방 배알이 뒤틀리는 수가 대부분일 꺼다.
선생의 인품을 미술 한다는 작자들의 대부분은 1/10을 채 알지 못한다.
선생은 이화여대에서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유신헌법을 반대하다 두 번이나 해직 당하시고
갈 곳이 없으셨다.
누가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큰지식인 김윤수교수를 자기 대학으로 천거할 용기가 있겠는가?
유배가 되다시피 하면서 박정희가 만든 영남대학에 교수로 오게 된 동기도
박정희 대학이기 때문에 누구도 방해하지 않아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민중과 지식이 오래도록 준비한 총탄에 의해 18년 5개월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더러운 권력이 절명하고 만다.
김윤수교수는 다시 이화여대로 복직이 급선회한다. 당시 안기부의 압력에 의해 김윤수교수를 이유 없이 해직해야 했던 이화여대의 김옥길총장은 문교부장관이 되었다.
김옥길 문교부장관의 첫 발걸음은 김윤수교수의 복직 건이었다. 박정희정권을 무너뜨린 지식의 메카인 <창작과 비평사>의 민족지식의 등불인 편집위원의 한 사람이자 창비대표인 김윤수교수를 유배하다시피 할 수 없어서다. 그러나 영남대학의 재단은 김윤수교수의 발목을 잡는다.
영남대학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재단은 김윤수교수가 미술성장을 위해 하고픈 꿈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매달렸다. 그래서 대학 끈 떨어지고 다행히 정착할 수 있었던 옛정에 이끌려 그만 주저앉고 만다.
박정희의 죽음은 민주화가 다 되어 가는 것처럼 되었으나, 전두환의 군부쿠데타에 의해 다시 대한민국의 정권은 박정희가 키워온 군부집단 하나회로 넘어가고 만다. 그리도 열망한 민주정권은 무참히 도륙 당하고 살인악마 전두환 군부집단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은 군사문화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김윤수교수는 오도가도 못하고 지방에 남게 된다. 재단 실세들은 순식간에 전부 물갈이되고 김윤수선생의 미술에 대한 큰 그림은 흔적이 없이 사라지고 만다.
내가 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81년 창작과 비평사를 조금 들락거려 볼 때다. 문학소년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때 계간 창비를 탐독하는 독자로 그냥 백낙청 염무웅 김윤수라는 그 세 분을 어렴풋이 머리에 남긴 상태였다.
딴에는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투사라고 자부심을 가질 때였다.
마포구에 위치한 창비사에서 가끔 뵈는 게 전부였고 늘 인사만 드렸지 어떤 대화도 그리 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때는 선생이 하늘같은 위치였고, 나야 뭐 어린 학생 혹은 어린 청년이니 말이다. 나는 서울에서 쫓기어 대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생이 영남대학에 오심으로 하여 뵈올 수 있었지만
나는 무엇하나 내세울게 없는 위치였다.
오랜 침묵을 두고, 선생의 주위에 서성인 세월 같다.
내가 가는 길이 다르고 선생이 가는 길이 다르다. 그 길이 만남이란 참으로 어렵다.
선생의 길은 이미 지명이 널리 회자되는 대로(大路)요 나는 꼬불꼬불한 끊어졌다 이어졌다하는 이름 없는 소로(小路)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대인이요 나는 소소인(小小人)인 시절이었다.
선생 같은 대인이 내 반경에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대구에 교수로 있는 박남희(경북대교수), 민주식(영남대교수), 정순복(대구가톨릭대교수), 유홍준(영남대교수, 문화재청장)등이 다 김윤수교수의 제자가 아닌가.

국주 이야기를 하다말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구나.
그 날 국주는 오랜만에 명가의 장어구이를 혼자 두 마리 넘게 먹었다.
어린아이의 양으로 포식하며
두 분의 이야기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가끔 TV에 비쳐지는 큰선생의 모습을 보고는
"어! 할아버지" 한다.
여름날 고향 갔다가 큰 산수박을 들고 선생님 댁을 방문하면 앉은뱅이 냉장고에 넣을 수가 없어서 네 토막으로 잘라 넣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빈약한 생활에 늘 만족하시며 검소함이 몸에 밴 고고한 인품의 민족지식인의 한 분인 김윤수교수


※임의적으로 띄우기를 않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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