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관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은 뒤 딱 20년 만인 2006년, 관훈미술관과 그리 멀지 않은 곳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다섯 번째 개인전 《검은 소묘》(12.14-12.26)를 연 여운 화백(민미협 회장, 한양여대 교수)을 인사동에서 만났다. “여 화백은 사람 좋아 술친구가 엄청나다”는 지인들의 말대로 인터뷰를 하는 내내 한, 두 명씩 모인 여 화백의 친구들이 결국 기자와 여 화백이 앉아있던 넓은 테이블을 가득 채워버렸다. 술친구에 둘러싸인 그가 들려주는 '내 그림 이야기'를 전한다.
왜 20년만이냐고? 그 질문에는 내가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어. 머리를 깨우치느라고 시간이 걸렸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넘어 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가슴에서 손으로 옮겨 가는데 시간이 걸린거야. 그런데 아직도 손에는 절반 밖에 안 온 기분이야.
개인전 끝나면 늘 그렇지. 아주 허탈해. 관훈미술관 전시 끝나고도 마찬가지였어. 20년 전인데도 그 때의 허탈함이 생생해. 그래서 그 때 생각했지. 앞으로 다시 전시를 하게 된다면 좀 더 집중해서 진지하게 작업하고 또 많은 양을 작업해서 그 중에 그림을 추릴 거라고. 골라서 차분하게 하려고 한거지. 그런데 뭐 인생이란 게 다 그렇잖아. 막힐 때가 많더라고. 원한다고 다 되는 거 아니라는 거 이제 잘 알지. 하지만 항상 마음 속에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 나한테 화도 내고, 뭐 그러다보니 초조해지고 두려워지기도 했고. 그러다 내 안에서 터져 나온게 바로 소묘들이야.
내가 8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간간히 소묘를 했다고. 우리 산야랄지 그런 것을. 그런데 이 작업이 하다 보니 맛이 있는거야. 한국사람의 정체성이 묘하게 그 안에 보이더라고. 한지 위에다 검정색을 배합해서 여백을 만드는 작업은 오래동안 있어온 형식이지만 나한테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어. 그 때 마침 평론가 최민 선생이 내 작업실에 들러서 하는 말이 잡다하게 여러 가지 하지말고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소묘를 해 보라고 하더라고.
정말 살다보면 신기한 일 많지 않아? 그렇게 오묘하게 시간맞춰 그 얘길 나한테 해주다니. 나 최민 선생 말에 아주 공감했어. 소묘 작업으로 물꼬를 터야겠구나 막연히 생각했지. 그러다 또 신경림 시인을 만났는데, 아, 그 양반도 자기는 화려한 그림보다는 검고 짙은 목탄작업이 좋더라, 하더라고. 그러다 보니까 나도 두려움이 조금은 가셨고, 그래서 아예 소묘 작업을 어떤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그림이 아닌, 아예 그 자체를 본작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굳히게 된거야.
이번 작업? 뭘 또 물어? 소묘들이라니까.(웃음) 나는 역마살이야. 요즘에는 강의도 있고 해서 멀리, 자주는 못가. 그래서 인사동 밤거리를 헤매는 인사동 밤안개가 되버렸어, 아주. 아무튼 나는 여행을 워낙 좋아해. 이번 전시에 건 작품들은 그렇게 발자국 찍고 다닌 곳을 그려놓은 그림들이야. 여행지에서 직접 스케치 한 것도 있고, 여러 번 같은 곳에 찾아가 장면을 마음에 담아와 작업실에서 그린 것도 있고.
음…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것이 슬쩍 스치면서 보는 경치가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야. 내가 오래동안 가지고 있는 기억과 추억, 나와의 관계에 있어 다가오는 것들을 그리고 싶어. 뭉클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 돼. 나는 산을 그려도 숲이 우거진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1월에서 2월까지의 잔설이 남아있는 산의 몸통을 그려. 산의 속살을 보여주는 장면, 감당할 수 없는 근육의 뭉클뭉클함, 거기서 느껴지는 억겹의 역사들, 이런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모티브야. 그래서 지리산에는 늦겨울에 정말 여러번 가게 돼. 그 장면이 눈 앞에 아른거려서.
요하강, 북한산, 마곡동, 철원, 지리산, 조계산 등 많이도 다녔어. 그 장면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을꺼야. 봤다고? 그래, 대추리, 대추리도 있었지. 대추리를 생각하면 참 마음이 먹먹해. 약소국으로서의 국가의 입장을 1%도 이해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서 평생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쫓겨 나야 한다는 사실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쫓겨남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파. 그러다보니 대추리, 도두리에서는 참 정말이지 어느 풍경 하나 안 아픈 풍경이 없어. 어느 하나 그냥 볼 수가 없지. 이런 감정들이 고여서 만든 작품이 <대추리의 풍경>, <대추리 옆 미군부대>, <도두리에서 대추리 가는 길>이야. 가슴에 있는 것을 다 표현 못하기도 했어. 너무 아파서.
<리 교수의 기억들>은 리 교수 정년 직전에 내가 모델로 모셔서 그린거야. 한양대 뒤에 가면 엄청나게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거든. 지금은 노천극장 만든다고 없앴다고 그래. 그림에 나오는 나무가 바로 그 나무야. 이젠 리 교수도 플라타너스도 없네. 그런게 시간인지. 아무튼 그 나무 옆에 리 교수를 모셔두고 그린 작품이야. 침략과 혼란기, 우리가 크게 당해왔던 것들, 그런 것과 양심적 지식인의 고통을 그리고 싶었어.
그런데 작품에서 리 교수 얼굴이 너무 시커멓게 나오지 않았어? 원래는 옅게 처리했었는데 그러다보니 너무 연약한 이미지가 되고, 좀 더 표현적으로 처리했더니 리 교수랑 닮지를 않고. 그 얼굴이 나 속 많이 썩였어.(웃음) 지금은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어서 나중에 얼굴만 다시 스케치해서 콜라주처럼 붙이려고. 지금은 그릴 바닥이 더는 없거든.
민미협과 민중미술… 그 질문은 예상을 하고 있었어. 내가 민미협 활동을 오래 해왔고, 현재 민미협 회장을 맡고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민중미술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 해 와서 나는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어. 그래도 얘기해야만 한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소화력이다’라고 말할래.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면서 그것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화력 말이지. 그러면서도 중요한 인식이나 의식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일단 생각했던 것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않돼. 이건 자기를 모색하는 것이나 다름없거든. 노력말이야. 내가 민미협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그런 소화력이야.
아무튼 역시 개인전은 해야겠어. 개인전을 하다보니 내 작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내 허점도 보여. 그 때 후회도 되지만 일단 발견은 했으니까 보완해 나가면 되겠지. 자기 작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나 생각해. 이제부터는 최하 3년에 한번, 빠르면 2년에 한번, 아니 아예 1년에 한번 씩 개인전을 해보려고. 시간이 지나면 육체는 슬퍼지거든. 더 많이 슬퍼지기 전에, 한 십 년? 그 안에 열심히 하려고. 그동안 게으르게 있었으니까. 해결해 내지 못한 자기 반성을 하는거야.
인터뷰를 끝내고 여운 화백의 그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았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끊임없이 칠하고 지운 흔적, 쩍쩍 갈라지는 듯한 흙 벽의 질감, 마른 수풀 사이로 난 흙먼지 이는 길에서 여운 화백이 말한 ‘뭉클함’이 느껴졌다. 또 선 하나하나에서 풀려나오는 자연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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