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미안하지만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다
‘민족문학작가회의’서 ‘민족’ 떼낸다고 뭐가 달라지랴
문제는 작가회의가 아니라 작품이고 작가다
문학은 민족이나 회의가 아닌 작가의 일이다
작가들이 나태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착취해야 한다
» ‘민족문학작가회의’서 ‘민족’ 떼낸다고 뭐가 달라지랴
간판에서 민족을 떼거나 두거나를 두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한동안 구설수에 올랐다. 매스컴이 부추긴 탓이 크다고는 하지만 사실 문학과 민족의 불협화음은 이미 오래전에 처리되어야 했던 문제이다.
전 시대에 민족문학은 분명히 제몫을 했다. 문학적으로는 문학이 그 암울했던 시대와 소통하는 길을 열었고 역사적으로는 민주화에 복무했다.
문학은 시대정신으로 충만했고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시대를 말하고, 은유하고, 영감을 던지고, 다음 시대를 앞당기는 데에 일조했다. 자유실천문인협회는 문학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시대에 문학이 가진 시대적 표상 중의 하나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회는 공교롭게도 바로 그 민족문학이 시대적 사명을 마치고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향할 때 민족문학을 간판으로 내걸었다.
말하자면 간판을 바꾸자 민족문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그 내리막길의 끝에 도달하기 전에 민족문학은
‘그 다음’을 예비하고 모색해야 했었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런 일은 없었다.
전 시대의 민족문학이 거두었던 성취가 대단했던 만큼 오늘 한국문학이 직면한 방황과 지리멸렬의 극단적 생산력 저하, 나태함의 책임은 상당부분 민족문학의 몫이다.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오늘 민족문학의 현실은 끔찍하다. 끈 떨어진 민족주의 대신 집착하고 있는 몰시대적 통일지상주의, 시대를 말하지 못하는 무력함, 시대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나태함, 80년대를 초점 나간 눈으로 바라보는 복고주의…. 어제가 아닌 오늘의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보여준 이 모든 우울한 결과가 오늘 민족문학의 내용이고 더불어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서 있는 현주소다.
남북작가회담은 드라마틱하게 그 번지수를 보여준다. 창작의 자유를 ‘위대한 장군님’에게 볼모로 잡히고 그만을 칭송해야 하는 북한의 작가들을 평양에서 만나 어깨를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붉히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넌센스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현실적 좌표이다.
창작의 자유를 위해 독재정권과 싸우던 자유실천문인협회를 계승했다는 작가회의가 주도했던 이 회담은 오래전에 좌표를 잃은 민족문학이 더는 나아갈 길이 없어 도달해버린 역설과 자가당착의 종착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 두 자를 간판에서 떼 낸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는 것도 난망하다. 또 미안한 말이지만 작가회의쯤이야 어떻게 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도 없다. 작가회의가 민족문학의, 나아가 한국문학의 위기를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작가회의가 무슨 일을 한다 해도 비상구는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회의는 단지 작금의 서글픈 위기를 안간힘을 다해 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위중함을 각성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새로울 것도 없지만 문학의 위기를 말하자면 문제는 작가회의가 아니라 작가이고 작품이다. 가끔씩 민족문학을 문학이론가나 평론가들이 선도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민족문학은 작가들의 노동으로 창작, 생산해냈던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평론가나 이론가가 무슨 몫을 할 수 있겠는가. 잘해봐야 후행으로 해설하고 뒤치다꺼리를 했을 뿐이다. 그건 그 노동의 숙명이다.
작가들의 노동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 노동은 끔찍하게 전근대적이다.(아마도 평론가나 이론가들은 그 사실을 알 것이므로 자신들의 처지를 위안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노동은 무한하게 고독하고 극단적으로 수공업적인 개인노동이다. 더불어 시대 그리고 세계와 끝임 없이 교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학습해야 하고 경험해야 하며 고민해야 한다. 작품은 그것들을 원료로 생산된다. 이게 이 노동의 숙명이다. 때문에 문학이 위기라면 그 책임은 응당 작가가 짊어져야 하고 해결 또한 작가의 지난한 노동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오직 작가만이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작가들이 그 책임을 떠맡고자 한다면 마땅히 ‘민족문학’과 ‘회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전시대의 문학에 매달려서는 새로운 문학과 전망을 생산할 수 없다. 작가란 원래 창작의 자유가 유린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회의할 일이 없는 족속들이다.
작가란 또 쓰거나 두드리는 시간 이외에는 꾸준히 시대와 교통해야 생산할 수 있다. 작가는 신문기자가 아니다.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 작가에겐 그 방법이 세계와 시대로 연결된 유용한 통로이다. 필요하다면 작가는 세계의 모든 곳에 있어야 한다.
전쟁터에조차 뛰어드는 군상들 속에는 종군기자만이 아니라 작가도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늘 그래왔다. 그것이 문학이다. 정치도 예외일 수 없다. 작가란 어떤 직업이라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양심을 지키는 한 작가는 작가로서 생존할 수 있다.
그러니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나아갈 길이란 어떤 길인가. 그 길은 간판에서 민족을 떼는 길도 아니고, 허망하게 집단의 이름으로 문학의 사명을 구하는 길도 아니다.
퍽 늦었지만 이제라도 간판을 온전하게 모두 내리는 길이다. 그도 아니라면 오다가다 들르는 휴게실로 그쳐야 한다.
문학은 민족이나 회의가 아닌 작가의 일이다.
작가들은 알아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착취하며 생산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이 노동의 숙명이다.
무력과 나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후에 시대와 세계에 묻자.
문학이 주인인지 거렁뱅이인지.
거렁뱅이라면 그 때 교살하면 족하다.
작가가 시대에 질문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지금은 그조차 이른 때이다. 유재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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