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편집자가 독자에게]자본에 휘둘리는 미술이 안타깝다
2009-01-19 오후 4:42:29
[ 안태호 편집장]
▲ 예술이 추문과 연계되어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는 불행하다. 삼성그룹이 비자금으로 구입했다고 알려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지금은 고인이 된 박이소 작가가 박모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의 도입부 서술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인류 역사의 걸작들을 도판으로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아래에 짤막한 코멘트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요. 페이지 당 하나의 사진과 한 줄의 코멘트가 들어가는 도입부는 20여 페이지나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코멘트의 내용은 한결같습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일반인들이 미술이라기보다는 선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우리가 꿈에서라도 미술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한 미켈란젤로의 작품들까지 포함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앞에 두고 미술이 아니었다고 하니 처음 책을 읽을 당시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습니다.
이 난감한 사태를 책은 ‘미술은 근대의 발명품’, 이라는 말로 갈무리를 하지요.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타난 경향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고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제도로서의 미술”이라는 이야깁니다. 파인아트체계가 확립된 것이 18세기 후반이니 그 전까지 만들어진 물건들은 미술이 아니었다는 게 정확한 인식이겠지요. 물론, 지금은 제도 내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안착한 누구나 다 인정하는 미술작품입니다.
책을 소개할 목적도 예술사 강의를 할 요량도 아닙니다. 다만, 최근 미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좀 한심하게 느껴져 꺼낸 말입니다.
현직 국세청장이 뇌물죄로 수감 중인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최욱경의 ‘학동마을’을 건넸다는 주장이 나와 미술동네가 또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그림로비 파문을 계기로 한상률 청장이 사의를 표했으니 이제는 둘 모두 전직 청장이군요). 작년에는 삼성그룹이 불법으로 조성한 비자금을 가지고 고가의 미술작품을 사들였다는 주장과 함께 박수근의 ‘빨래터’ 위작논란이 미술계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술이 정치적 스캔들과 연계되어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물론, 미술이 축재나 청탁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정확한 학문적 근거나 사료들을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를 다룬 소설이나, 서양의 경우에도 수백 년 전 사회를 다룬 이야기들에서 미술품이 청탁의 용도로 사용된 내용들이 가끔 나오니 말입니다. 미술작품은 희소한 가치로 인해 높은 가격을 형성합니다. 취향의 문제가 개입하면 가치재로서의 예술품의 격조는 더욱 높아지고 이를 소유한 이들의 품위까지 보증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양도세가 붙지 않아 실제 추적도 용이하지 않으니 뭔가를 요청하는 이나,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인 셈입니다. 부정축재나 뇌물이나 양자 모두, 국가가 예술 진흥을 위해 예술작품에 대한 세금을 면해주는 것을 교묘히 활용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겠지요. 위작 문제 역시 철저하게 욕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가짜를 만들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저열한 욕망이 예술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자행되는 셈이지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예술이 돈이 된다는 사실에 비애를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작품이 더 비싼가, 중국미술이 한참 인기라던데, 팝아트를 사두면 수익률이 좋다던데, 이 작품은 틀림없이 오른다, 등속의 말들은 예술의 본래의 가치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만듭니다. 이 경향이 심화되자 미술이 자본을 파트너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미술을 기획하고 예술 자체를 왜곡하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의 미술시장은 세계미술시장의 급등세에 힘입어 상당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2008년 초까지만 해도 한동안은 더 지속될 것 같았던 ‘좋은 시절’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부터 시작된 세계경제의 추락에 발맞춰 기세가 확 꺾여버렸죠. 그 동안 돈 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화랑들이 기획작가를 양성하고, 위작스캔들이 튀어나오는 등 온갖 종류의 추문이 난무했습니다. 언젠가 한 선배가 지역의 미술대학에 강의를 다닌 경험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학생들이 설치나 다른 작업은 도외시한 채 ‘모조리 페인팅만 하더라’며 헛헛한 웃음을 짓더군요. 한창 미술시장이 달아올랐을 시점인 2007년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학생들의 작품이라도 조금 팔릴만한 구석이 보인다 싶으면 화랑들이 입도선매하다시피 하는 경향마저 있었다니 이 학생들이 순수하게 ‘오버’한 것만은 아닌 셈이죠.
‘행복한 눈물’이나 ‘빨래터’ 위작논란 같은 경우도 미술이 자본과 적극 결탁하는 사회에서 예술작품과 일차원적인 욕망이 결합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술작품이 교회와 패트런의 손을 벗어나 독립하던 순간부터 어쩌면 이런 운명은 예정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돈과 관계없는 고고한 예술은 어쩌면 현실과 관계 맺는 것을 거부하는 치기어린 포즈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살아생전 단 두 점의 그림만을 팔았지만 죽어서는 예술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팔지 못해 늘 절망에 휩싸여 있었죠. 자본에 휘둘리는 미술만이 판치는 요즘의 상황이 더욱 답답해지는 까닭이 이 풀리지 않는 모순 속에 숨어있는 걸까요.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위작들은 젖혀둔다 쳐도, 최욱경의 ‘학동마을’이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미술일까요. 물론 이 작품들 역시 당연히 제도의 순환 안쪽에 있는 어엿한 미술입니다. 게다가 자타가 인정하는 ‘걸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잡한 욕망 역시 제도의 한 축이라 생각해야 할까요. 작품의 본질을 떠나 범죄에 활용되는 그 순간만큼은 제도에서 이탈해 있는 게 아닐까요. 미술이라는 게 절대적 제도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령 그렇다 해도 그 작품들의 가치가 일방적으로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 순간만큼은 미술이라고 부르고 싶어지지 않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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