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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민중미술이라는 거룩한 이름의 낙인(烙印)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12.

민중미술이라는 거룩한 이름의 낙인(烙印)
* 6월 ‘포커스’ 원고이다.
반이정 | 미술평론가 | http://dogstylist.com/


가정의 달 5월이라는 관공서발 수사가 무색하게, 한국 현대사에 오점이 된 반역사적, 반가정적 거사들의 집중현상은 5월을 4월의 이름(잔인한 달)과 왕왕 헷갈리게 한다. 잔인한 달과 인접한 지난 5월, 미술가에는 흥미롭게 대비될 두개의 전시가 개최되었다. 민중미술 1세대로 분류될 이종구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결정한 <올해의 작가>가 되어 나타났고, 작가의 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민중미술세대로 묶여 이해되는 조습은 대안공간 풀에서 자신의 2회 개인전 경력을 덧붙이며 <묻지마>라 외쳤다. 11년 전 제도권의 공식 조명(9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 15년])이후 민중미술의 현주소를 선후배 세대의 시각을 통해 되짚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전시관계자의 전언에 의하면, 이종구는 자신을 민중미술가로 불리는 것에 예민한 반응이었다 한다. [월간미술] 94년 2월호의 민중미술 특집 표지로 작품이 채택된 그가 민중미술가라는 분류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 작가의 심기가 반영된 탓인지, 두툼한 도록에 실린 두 편의 긴 해설문 어디에도 그 흔한 ‘민중미술’은 지문 속에서 찾을 수 없다(시기별 작품변화를 소개하는 장에서 민중미술이 단 한번 사용되지만, 그건 2001년 작가가 발표한 글을 인용하면서 묻어온 것에 불과하다). 되려 김윤수 관장의 인사말에는 “그의 그림을 어떻게 분류하고 딱지를 붙이든 상관없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마저 등장한다. 이것이 민중미술을 대하는 2005년 미술계의 정서가 아닐까? 정치사의 전환기이던 93년 문민정부 이래 민중미술은 자신의 ‘고전적 타격대상’을 상실했다. 그 다음해인 9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민중미술에 대한 ‘공인’을 두고, ‘민중미술의 장례식’이라는 세간의 냉소를 대담에서 소개한 김정헌(<월간미술> 94년 2월호)이나, 전시회를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며 결과적으로 “얻은 것보다는 놓친 것이 더 많은 전시”라고 평한 성완경(<가나아트> 94년 3-4월호)의 우려는 급변한 정세 앞에 놓인 민중미술의 기로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민중미술 1세대의 사례만큼이나, 포스트민중미술 역시 후발세대에게 거북한 명칭인 걸로 치면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지난 5월 인사미술공간에서 기획한 작가 대화에서 조습, 송상희, 옥정호는 그들을 규정하는 이 괴이한 조어를 영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접두어 post(탈, 후기)의 설익은 양해에도, 민중미술이라는 4음절 단어의 고유한 발성은 대단히 정치적이고 또한 과격한 구호처럼 인지되어온 탓일 게다. 이들 차세대 작가는 해묵은 훈장 마냥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이미지들과 자신들의 재기발랄한 작업이 하나로 싸잡아 거론되는 것이 공정치 못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민중미술 1세대 작품 중 비루한 현실을 담담히 그려낸 것이 수적으로 다수였음에도, 민중미술을 둘러싼 이 같은 오해는 이 단어가 발음되었을 때의 투박한 어감과 미술 앞에 붙은 수식어 ‘민중’이 차지하는 주제의 제약성이 낳은 불편함 때문이리라. 혹은 러닝셔츠 차림에 눈을 치켜뜬 노동자, 농민의 군상들이 청, 적, 백, 흑으로 원색 분해되어 대형걸개 속에 등장하는 것과 보통명사 민중미술이 등가물로 인식된 탓도 클 터인데, 이 강력한 시각적 최면 현상은 최민화가 이한열의 노제를 위해 ‘단 하루만에’ 전투적으로 제작했다는 87년 [그대 뜬 눈으로]처럼, 노상에서 마주했던 지난 민중미술이 하나같이 시위군중과 그들이 부르는 행진곡풍 노동가요와 하나의 시청각 교보재로 패키지 되어 경험된 탓이 클 것이다.

이종구_아버지의 낫_장지에 아크릴 채색_188×96cm_1992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현실과 발언’ 5주기(85년)에 출간된 단행본[현실과 발언]의 한 꼭지(‘거룩한 미술’로부터의 해방)에서 안규철은 ‘현발’이 기존미술체제에 포섭될 우려를 지적하며 “화랑을 통한 발표”보다는 “벽화운동과 같은 보다 직접적인 소통”이 아쉽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미술사는 그의 요구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야전에서 쓰일 용도의 ‘정치적’ 벽화와 걸개가 공안경찰에 의해 파손되어 남아있질 못한 반면, 화랑에 내걸 용도의 ‘정치적’ 그림들은 구사일생하여 오늘의 작가가 되었다. 사실 이종구의 농촌 연작은 벼랑에 내몰린 한국 농촌현실을 지난 20년간 관찰해온 진중한 현실참여의 성과이기에 앞서, 쌀부대 위에 불투명 아크릴로 달성한 세밀한 정밀 회화의 미학적 수작이기도 하다. 열악한 작업여건 하에서 시대상황에 따라 급조된 조악한 조형성과는 다른 지점에서 이종구의 현실과 발언은 출발했다. 설령 그의 작업이 부조리를 직시한다는 동일한 초기 조건 속에 놓였다 할지라도. 하여 이종구의 농촌 그림은 타워팰리스의 거실에 걸긴 뭣할지언정, 국공립미술관의 소장품으로는 하자가 없는, 즉 미술시장이라는 유통구조를 고려해 제작된 미술품이다. 그리고 현재 민중미술의 존립은 이러한 유통망 속에서나 가능하다. 당연한 얘기. 왜냐하면 민중미술도 결국 어쩔 수 없이 ‘미술’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시 정치 상황이 설령 ‘조금만 더 쳐’ 줬다할지라도 그의 농촌그림이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농촌을 방관한 위정자에게 위협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올해의 작가>가 진행 중인 넓은 전시장을 돌아보면 느낄 테지만 황토빛 채색과 농기구, 조야한 슬리퍼와 거대한 쌀부대 회화를 지속 반복적으로 마주할수록, 아무래도 농촌현실에 무관심한 대다수 도심 관객에게는 농촌의 위기를 재현하는 작가의 전달 의도보다는 세밀하게 묘사된 장대한 스펙터클과 그것이 ‘농촌의 문제를 그렸다’는 도식화된 해설만이 창백한 기억처럼 남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작품의 수용과정은 오래전부터 미술관에 입성한 참여 미술이 당면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민중미술로 국한 지으려는 주변의 규정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불편함은 역설적이게도 당연해 보인다.

불연속적인 계승은 계속 된다

동양화 전공인 조습의 석사학위 논문은 [권력과 우상에 명랑한 시비걸기]이다. 제목은 그렇다 치자. 목차와 본문을 따라 읽다보면 정상적인 심사절차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표현과 구성을 만나게 되는데, 완화된 심사 덕인지 이렇듯 괴상한 작가를 관객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조습은 데뷔 초부터 시종일관 괴상했다. 때문에 사뭇 심각한 민중미술의 후발주자로 조습이 지목되는 양상은 대단히 기이한 해석처럼 느껴진다. 1세대 이종구가 농촌의 재현과 연관되는 이름이듯 후발세대 조습의 비일상적인 이름은 웃음에서 시작해나 피떡이 되어야 비로소 끝나는 서술구조, 도를 넘어선 분장, 감정과잉의 연기, 지인 위주의 배우 캐스팅 등이 연상되는 명랑 작가로 이해된다. 하지만 변모한 세상에 호환될 비판의 방법론을 작업 위에 탑재시켜 사회문제를 거론해온 ‘진지하게 촐랑댄’ 작가이니 만큼 포스트민중미술로 분류하지 못할 이유 또한 없겠다. 조습은 남한 사회에 일상화된 폭력의 일반성을 취급해왔다. 그것이 학교, 종교, 군대라는 합법적 교정기관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왔다. 금번 그는 부조리의 일반성에서 구체적인 역사의 특수성으로 타격 대상을 선명하게 옮겼다. 이를테면 특수를 통해 일반을 지적하는 방식이고, 방법론적으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는 전형적인 알레고리이다. 5.16 쿠데타의 기록사진을 조악한 노래방 문화 속에서 폄하하고 날조하면서 그 스스로 각하가 되어 역사에 뛰어든다(이것은 작년 영부인이 된 송상희와 비교할 만하다). 또 10.26 저격만큼 인구에 크게 회자가 된 궁정동 만찬장의 시바스 리갈을 대신하여, 그가 즐겨 마시는 ‘참이슬 리갈’이 상 위에 올려졌다. KAL기 테러범 김현희 배역은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를 분장시켰다. 죄다 그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현장 속에, 지나간 역사의 무게를 가볍게 재구성한 것이다. 조습을 중심으로 후발 세대가 취하는 알레고리(송상희와 옥정호도 마찬가지)는 선배세대가 타격 목표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과 가장 대조되는 현상이다. 이들이 과거의 사건들을 불러와 현실 공간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선배 세대가 처한 현실과는 달리, 정치적 타격 대상이 불분명한 탓도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직설화법의 동원이 오히려 수용자의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술계의 감성은 이렇듯 변했다. 그러니 조습과 그들 세대는 정치에 대해 말하면서도 애당초 전시장을 고려한 유쾌하거나 발칙한 작업을 한다. 이제는 경멸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화이트 큐브’야 말로 이들 작품이 걸리기에 딱 맞는 장소이다. 이들은 전시공간으로서의 집회장소와 거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들이 포스트민중미술로 지칭되길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세적 현대사에서 용공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민주인사들이 명예회복 직후로도 정서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걸 기억할 것이다. 민중미술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노정을 걷는다. 이제는 많은 미술인들이 그들의 공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정치적, 미학적 핍박을 견뎌낸 민중미술은 빛바랜 훈장보다는 붉은 낙인으로 여전히 이해되고 있다. 엄혹한 80년대에는 미학적 몰취향과 정치적 예술로 폄하되었고, 시대가 바뀐 90년대와 지금은 쟁점을 상실한 채 후일담이나 늘어놓는 예비역 신세가 되어있었다. 그러니 민중미술이란 이름은 동일한 정치 사회적 비판을 공유하는 미술계의 차세대는 물론 원조에게조차 꺼림직 한 직함이 된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누구나 기피하는 이름. 바로 민중미술이 오늘 넘어설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낙인이자 정서적 장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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