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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소개/협회개요

민족미술인협회 개요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19. 10. 16.

 

문학 쪽에서 순수-참여논쟁이 한창이던 1969년 10월, 시인 김지하가 기초하고 미술평론가 김윤수가 감수한 <현실동인 제1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은 당시 서울미대 재학생이었던 오윤, 임세택 등 3인의 그룹전 <현실동인전> 카탈로그에 수록된 것으로써, 당대의 한국미술 속에서 창궐하고 있던 형식주의와 자연주의의 오류를 비판하고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는 점을 분명한 어조로 공표하였다. 교수들과 관계기관에 의해 오윤의 그림은 압수당하고 찢겨져 없어져 버렸고 전시회는 취소되었지만 <현실동인 제1선언문>은 현실주의 미학'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메니페스토이자 한국민중미술의 출현을 감지한 진원지였다.

 

이후 70년대, 김윤수의 글들에 의해 맥락을 이어오던 현실주의미술이 폭죽처럼 터져오른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현실과 발언>, <두렁>, <임술년>, <서울미술공동체> 등 미술가동인, 그룹들이 속속 결성되고 <신촌의 겨울전>, <해방40년역사전> 등의 전시가 잇달았다. 이들은 유신말기, 광주항쟁의 시기를 반영하듯 시대의 우울과 광기, 기성화단에 대한 야유와 조롱, 청년작가로서의 자괴심과 분노의 칼날을 들이댐으로써 공격적으로 시대 현실에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민중미술은 80년대 이전의 고답, 관념적인 한국현대미술과 광주민중항쟁으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폭압적 정치상황에 대한 안티 테제로 출발하였다.

 

1985년, 민중의 저항에 직면한 독재정권의 칼날이 차츰 무디어져 갈 무렵, 민중미술가들은 아랍미술관에서 대규모의 청년작가연립전을 개최하였다. 이름하여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었다. 이 전시에 대한 독재정권의 대답은 곧 작가연행과 작품탈취로 드러났다. 이 도전적인 탄압에 마주한 민중미술가들은 생존권 수호 차원에서 '창작표현의 자유 쟁취'투쟁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집단적인 대응을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편 당대의 사회운동은 탄압국면을 뚫고 민청련, 민통련, 민문협 등의 결사체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민중미술가들의 조직결성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1985년 11월 22일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현실과 발언>, <임술년>, <두렁>, <서울미술공동체> 회원을 포함한 120여명의 미술가들이 모여 민족미술협의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손장섭 대표, 김용태 사무총장, 홍선웅 총무로 진용을 갖춘 민미협은 곧이어 불어닥친 '깡순이 작가 이은홍 구속사건', '신촌벽화 및 정릉벽화 파괴사건'에 대항하고 기관지 <민족미술>을 창간하여 민중미술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한편, 전문 전시공간 '그림마당·민'을 개관(1986년)하여 이후 민중미술의 전시, 집회, 교육의 장으로 무수히 활용함으로써 민중미술 진영의 저항 거점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사이 민미협은 민족화가 오윤을 잃었다. 폭넓은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토대로 민족전통을 체화하면서 동시대에 가장 힘있는 예술작업을 실현해낸 '칼노래'와 '애비'의 작가, 민족미술의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1987년 들어 독재정권은 제헌의회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한 나이 어린 대학생을 고문, 치사케 하는 전율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군부독재정권은 그 진상을 은폐하고 사건을 축소 왜곡하였다. 이에 민미협은 발빠르게 고(故) 박종철군 추모<반 고문전>을 열어 인권회복과 고문근절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고, 이 외침은 각계각층의 힘과 연결되어 6월항쟁의 함성으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물론 이 전시회는 종로경찰서 3개 중대와의 대치 속에서 몸싸움과 항의전단 살포, 전시작품 탈취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1987년은 저지투쟁에 힘을 쏟은 해이기도 했다. 당시 에는 행사장소인 몽촌토성을 훼손하고 낭비적인 전시행사로 변칙 운영되는 등 문제점이 많아 많은 미술인들의 반발과 거센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민미협은 회원을 비롯한 양식적인 미술인 500여명으로 를 구성하여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공개질의서를 제출하는 한편 공청회를 통한 비판 여론형성에 주력하였다. 이후 이 투쟁의 전말은 <서울올림픽미술제, 무엇을 남겼나>라는 백서로 묶여져 나왔다.

1988년 들어 민미협은 창작방법론 논쟁과정에서 조직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87년 <제2회 통일전>에 출품된 몇몇 작품을 놓고 비판과 옹호의 설전 속에 부각되기 시작한 논쟁은 작품의 내용과 형식, 예술과 선전의 개념 혼란, 미술운동의 주체, 사상과 미학문제, 개인과 조직의 관계, 그리고 정치적 입장과 사회전반을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미술운동의 조직분열로 이어졌다.

89년에 새겨진 미술운동의 이력서는 사건과 탄압의 연속사였다. 경찰의 전시장 난입과 작품파괴, 작품압수, 작가 구속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민미협은 성명서 배포와 항의 집회, 철야농성으로 맞서나갔다. 그해 8월에는 87년에 제작된 신학철의 작품 <모내기>가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를 씌운 공안당국의 올가미에 걸려 작가가 구속되고 작품이 압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수경양과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야기된 공안정국의 돌풍이 민미협을 비켜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6여년이 지나오면서 1심 무죄, 2심 무죄, 원심파기환송, 다시 유죄판결(서울지법 합의부), 대법원에 상고로 이어지다 대법원에서 유죄(선고유예 10)를 판결했고 지금은 유엔인권이사회에 재소한 상태이다.

이상 80년대의 민미협 활동에 관해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80년대 미술운동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통일전>을 비롯한 <여성과 현실전>, <정치선전전> 등의 전시회를 축으로 민족미술대토론회, 시민미술학교, 노동운동연대지원 활동 등을 통해 대중과 결합을 모색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성과들을 쌓아 나갔다. 판화-만화-벽화-걸개그림-시각매체로의 전이과정에서 드러나듯이 대중소통의 확산과 끊임없이 정치적 메시지를 생산해낸 민중미술의 파급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컸다.

하지만 80년대 미술운동은 그 성과만큼 한계 또한 뚜렷하게 드러냈다. 80년대 후반 들어 두드러지기 시작한 집단주의적 창작 경향은 개인의 창작역량을 부차화 시키고 조직창작의 전범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창작수준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장인정신이 결여된 집단주의와 창작 주체가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는 미술의 전근대적 유제( 制)의 불행한 만남을 의미했다. 도 80년대 미술운동은 이념의 과잉과 실험정신 사이의 간극을 노출시켰다.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전략적 전망(민중민주주의)에 미술운동의 과제를 기계적으로 종속시키는 '전술없는 전략'에 매몰되었고 커뮤니케이션의 극대화를 위한 실험(장르파괴, 매체실험, 퍼포먼스 등)이나 모더니티의 추구보다는 공동체 사회에 대한 투박한 바람이나 일그러진 현실 고발을 드러내는데 머물렀던 점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80년대 미술운동에 대해 '흉악한 적'과 싸우다 보니 당신들 스스로가 '난폭한 조형적 독선'에 빠져버렸다는 세간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90년대 들어 민중미술의 도드라진 성과는 지역미술운동의 성장이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를 필두로 충북, 대구, 제주, 인천 등지에서 지역 민미협이 차례로 둥지를 틀었고 이 자생력은 시민대중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힘을 길러갔다. 이 힘이 <오월거리전>, <김복진미술제>, <황해미술제>로 결집되었고 지역민예총의 결성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했으며 서울 중앙 중심의 민미협을 지역연합 성격을 지닌 '전국민족미술인연합'으로 재편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 1월, 기존의 민미협을 해체하고 전국 12개 지역미술운동단위를 묶는 전국민족미술인연합<약칭 미술연합>이 결성되었다.

90년대 들어 미술운동이 모색해 들어간 지점은 크게 보다 두가지이다. 그 하나는 제도권 진입 시도이며 다른 하나는 미술개념과 표현영역의 확장이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과 95년부터 시작된 <광주비엔날레> 참여로 대표되는 민중미술 진영의 제도권 진입시도들은 민중미술이 장외에만 머물러 있는 언더그라운드 미술이 아니라 오버그라운드 공간으로 이동하는 영역확장의 계가기 되엇다. 또 미술개념을 확장하고-기존의 민중미술과 거리를 두면서-새로운 매체를 도입하여 도시, 공간, 소비, 육체, 욕망과 같은 일상적 주제를 중심으로 '미시정치'에 개입하려 했던 '비판적'미술의 시도와 '공공미술'에 대한 개입을 통해 미술의 공적개입을 확장하려한 시도-기념조형물, 도시공공벽화 등-들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이 대세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물론 제도권 진입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진입의 원칙과 목적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운동'의 정체성을 상실해갔으며 미술연합을 비롯한 미술운동 진영은 이러한 진입을 거부할 만한 힘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이후 '명시적 의미'에서의 미술운동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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