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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민족민중미술, ‘기억의 자살’이후를 꿈꿔라!-- 5.18항쟁 25주년 기념전 <길에서 다시 만나다>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13.

문화예술 9월호

글-김종길

민족민중미술, ‘기억의 자살’이후를 꿈꿔라!
- 5․18항쟁 25주년 기념전 <길에서 다시 만나다>.
5월17일~8월9일. 부산, 광주, 태백, 서울 순회전 -


“작가로서 내가 4·3에만 매달리는 것은 편협한 지방주의 때문이 아니라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문학적 전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에 응축되어 있는 민족적·민중적 모순을 통해 보편성에의 요구에 응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현기영

지난달, 어느 라디오프로와 전화 인터뷰하던 그는 ‘기억의 자살’이라 했다. ‘순이 삼촌’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해묵음 죽음’이며, “30년 전 그 옴팡 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 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은 죽음이고, 4․3의 기억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 인간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현기영은 순이 삼촌의 죽음을 기억의 자살이라 했다. 수 십 년을 살아 있었지만, 이미 삼촌은 4․3의 현장에서 죽었던 것이며, 그 죽음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자살’이란다. 그러나 우리는 4․3에서, 5․18에서 그렇게 ‘자살’하는 많은 민중들의 삶을 여전히 목도한다. 그리고 그 피눈물의 항쟁이 예술의 씨앗이 되어 시인에게 더 많은 시의 원천을 제공하고, 소설가에게 소설을 쓰게 했으며,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던 슬픈 역사를 기억한다. 민족민중미술도 이 역사의 모궁(母宮)을 탯줄로 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현기영의 고백은 민족민중미술이 걸어와야 했던 목적 지향에 다름 아닐 것이다.    

민족민중미술, 그 실천 미학과 행동주의
지난 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출현이 가져 온 ‘새로움의 충격’은 로버트 휴즈의 말대로 ‘도전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충격은 가히 폭발적 에너지로 전 세계 미학의 통일성 ․ 보편성을 조장하며 아류적 ‘근대성’을 양산해 냈다. “예술은 불만과 선동, 정치적 압력을 위한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해 왔을까?”라는 휴즈의 의문은 그 충격의 첫 번째 질문이었지만, 인상주의 위주의 이식과 같은 자기 입맛대로의 문화유입은 서구미학의 특질인  ‘전복의 미학’을 걸러 버린 껍데기뿐인 미학이었다. 그들의 ‘전복’이,  앞선 미술의 사조와 이념, 이데올로기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끊임없이 대응 전략을 구사하며 현실적 대안을 찾아 나섰던 것을 주지한다면, 분명 우리가 취사선택한 모더니즘의 미술은 그러한 ‘전복’마저도 상실해 버린 ‘백색 혹은 탈색의 미학’은 아닐는지.

예술이 살아있음은 ‘불만과 선동, 정치적 압력’을 모두 포용했을 때이다. 이때 정치적 압력은 권력의 하수 기제로서의 선동미학이 아닌, 부패정치에 대한 예술적 발언으로서의 ‘압력’일 터이다. 그러나 물밀 듯 밀려들어 온 1950년대 이후의 다양한 모더니즘 미술 유입에서 취사선택된 미학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따위의 실존주의 미학이었으며, 이후 앵포르멜과 모노파로 대표되는 순수추상이었다. 여기서 예술가의 내적 충동의 격정을 그려낸 추상표현주의는 전쟁이후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절망에 가까운 ‘비애미’로 전락하게 되며, 정치적 격변과 독재의 출현이 맞물리는 1960년대 중반의 미술계는 ‘순수추상’이라는 모호한 이상주의에 열광하게 된다. 당시 미술이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대중을 위한 선전 선동의 ‘찌라시’쯤으로 타락해 가던 것을 생각하면, 그 타락의 미술가들이 미술계 내부의 중심부를 장악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순수’라는 거창하고 위대한 미술의 고고성(?)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아이러니하다.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비수를 든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일이었을 테니까. 바로 이것이 한국 현대미술의 맹아기(萌芽期)였다.

그러나 4․19의 반독재 민주주의 이념으로부터 비롯된 반체제혁명운동은 끝내 유신정권을 꿈꾸던 한 독재자의 꿈을 좌절시켰고, 여세를 몰아 뒤 이은 군부정권의 총칼에 맞섰다. 일그러진 현대미술의 맹아가 핏덩어리 사생아인 ‘민족민중미술’을 낳았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1977년 5월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낸 방경복의 『노동자의 길잡이』는 사건의 작은 사례일 터이지만, 1980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의 <현실과 발언 창립전>은 태동의 뿌리였다. 물론 일제 식민지하 ‘카프’의 활동,  1969년 <현실동인전>과 같은 논쟁의 이슈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현실과 발언’을 뿌리의 시초로 여기는 것은, 이 전시를 시발로 하여 한 시대가 거대한 미학의 회오리를 탄생시키며 거센 저항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온하다하여 전시장에서 철거당했으며, 동산방화랑에 모여 촛불을 켜고 전시했던 당시 작품들은 실천미학의 증거들이었다. 그것은 ‘불온’의 미학이자, ‘촛불’의 미학이며, ‘실천’의 미학인 셈이다. 이는 드디어 한국 현대미술이 자생적 뿌리를 가지며, ‘불만과 선동, 정치적 압력을 위한 이미지’를 창출하기 시작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민족민중미술의 출현은 자연스레 “제도문화의 관리와 보호 속에 갇히고 닫힌 공간으로 존속해 오면서 자신의 권위와 신비성을 구축하고 명예, 출세, 신화 창조, 재물축적 등 생산과 수요의 유통구조에 따르는 갖가지 기득권을 누리고 전파”(원동석)해 온 기존미술에도 반기를 들었다. ‘현실과 발언’ 창립 취지문을 보면,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적인 속물적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밖으로부터의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 왔고 내면적 진실조차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통박하고 있다. 그리고 1986년 7월 『민족미술』창간호에서 손장섭은 “물신화 되어버린 이 국토 위에 널려진 온갖 시각적 노폐물을 세척하고 상업화되어버린 미술의 오염에 찌든 우리 미술계의 현실에 맞서 건강한 미술문화의 꽃을 피울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탄탄한 조형 역량과 함께 민중적 삶의 내용 안에 함께 담겨 있음으로써 획득 될 것”이라 말하며, “튼튼한 현실과 역상에의 믿음을 기초”로 “예술적 실천과 행동을 힘차게 구현”하자고 부르짖는다.

민족민중미술의 핵심은 이렇듯 예술적 실천과 행동에 있었다. 『민족미술』창간호에서 원동석은 1980년대 전반기 ‘민중 미술운동’을 점검하며 “역사의식의 자각이며, 억압적 삶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해방적 삶을 향한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미술사상 획기적인 전환기”라 상찬했다. 후반기에 운동의 활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전체 민중미술운동 그 내부의 활동성과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오윤에 의한 목판화의 화려한 부활, 현실 리얼리즘 미학의 한국적 성찰, 활발한 미술담론의 풍토, 걸개그림 ․ 벽화 등 전통의 새로운 해석과 현장화, 전통 연희와 예술장르의 습합과 창출, 잃어버린 근대미학의 재해석, 미술운동사적 연구와 미술가 복권 등 한쪽바퀴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 미술사에 다른 한쪽의 바퀴를 생동으로 형성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개인의 미술사를 넘어 선 공동체적 ‘운동’으로서 미술 생태계를 안착시키며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 즈음 사회주의 개혁 이데올로기인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불과 5년이 채 되지 않아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사회주의의 개혁이 아닌 사회주의의 붕괴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1987년 민중에 의해 6․29선언이 성취되었고, 1990년 사회주의는 몰락했으며,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30여년의 군부독재는 막을 내렸고,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민중미술 15년, 1980~1994>이란 전시가 개최되었다.  

길에서 누구와 만날 것인가?
5․18항쟁 25년, 민족민중미술의 역사는 다분히 ‘광주’에 전적으로 빚지고 있다. 민중의 죽음이라는 역사의 ‘희생’으로 인해 광주는 민족민중미술의 제단에 영원히 타오르는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25년의 세월은 희생의 진실을 모든 역사 민중의 삶으로 구체화하고, 또한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민중 미학의 개념을 돌출해 내며, 그리하여 새로운 역사의 대향적(對向的) 패러다임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바쳐졌다. 그러나 1994년 <민중미술 15년전>이후 민족민중미술은 대응의 목적지향을 급격히 상실해 나갔고, 그동안 ‘공동체적 운동’이란 전략아래 소집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오던 작가들이 개별적 작업으로 돌아 섰으며, 민중 미학에 대한 논의는 산발적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결코 새로운 예술의 습합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술에 국한 하지 않고 현실문화연구에 대한 논의로 확장한 것은 이론계의 몸부림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민족민중미술 역사 기억의 화두였던 ‘광주’도 더 이상 쟁점이 될 수 없게 되었다. 작가들은 이제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화두를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적 삶의 태도로서 작품의 생산과 판매를 인정해야 하는 자본주의 노선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실천미학과 행동주의의 깃발을 여전히 나부끼며 앞장선 이들도 눈에 띈다. 지역에 거점을 두고 옛 풍경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풍경을 마치 다큐멘터리적 시야로 화면을 확보해 나가는 민정기는 일종의 ‘수종학사’의 중심 파동이라면, 홍성담과 최병수는 여전히 현실, 현장을 고집하며 미학적 담론을 최전선에서 부르짖는 행동주의 예술가이다. 또한 1994년을 기점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육지의 활동과는 다르게 4․3이라는 화두를 끌어내어 현재까지 10여년 넘게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탐라미술인협의회(제주민미협)는 실천미학의 동일성에서 벗어나 그들 나름의 지역적 테제로 승화시킨 대표적 예가 되고 있다. 자, 그렇다면 5․18항쟁 25년-민족민중미술 25년의 당대적 문제와 화두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원동석과 ‘현실과 발언’이 통박했던 그 문제적 양상이 지금 민족민중미술계 진영에서 싹트고 발아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문장 그대로를 다시 읽어 보자.

“제도문화의 관리와 보호 속에 갇히고 닫힌 공간으로 존속해 오면서 자신의 권위와 신비성을 구축하고 명예, 출세, 신화 창조, 재물축적 등 생산과 수요의 유통구조에 따르는 갖가지 기득권을 누리고 전파(함)” - 원동석,『민족미술의 논리와 전망』, 381쪽

“기존의 미술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이든, 유한적인 속물적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밖으로부터의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관념의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 왔고 내면적 진실조차 발견하지 못하였(음)” - ‘현실과 발언’ 창립 취지문  
  
즉, 현존하는 민족미술협의회는 한국현대미술에서 ‘순수’와 ‘참여’라는 대향의 거대한 미학담론의 창출로부터 25년 후, 그들 스스로 비판해왔던 이들과 동일한 존재적 양태로 변질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노화되고 있다. 1986년 『민족미술』에서 “십년의 반을 넘긴 미술의 새로운 물결은 이제 ‘새로운’이란 형용사를 붙일 수 없을 만큼 낡고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를 주도한 작가들도 40의 고비를 넘어선 소수의 선배층이 되었으며 신진 작가들의 후속적 배출로 인하여 증폭된 변화는 선후배들 간의 맥락이 생겨나고 유파적 다양성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운동의 주도권이 어느덧 후진에게 넘어가는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자찬한 것은 이제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아무리 미술 활동이 생태계의 순환처럼 자연적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목판화의 부흥이 한 시기에 막을 내리고, 여전히 민중미학의 정립은 요원하며, 그 활발했던 미술담론은 부재중이며, 걸개그림과 벽화운동 또한 그 성장의 열매를 따지 못했고, 장르 간 습합과 창출의 지속은 고사하고 문화적 ‘통섭’을 부르짖는 마당에 새로운 매스 미디어에 대한 이해와 연구, 실험도 활발하지 않고, 후진은커녕 신진 후배마저 생겨나지 않게 되었느냔 말이다. 도대체 십 수 년의 그 깊은 뿌리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참된 현실에의 절대적 숙명 속에서 현실 실천미학을 온 몸의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그 강인한 뿌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길에서 도대체 누구와 다시 만나야 하는가!

기억의 자살 이후를 꿈꾸자
‘진실의 가장 큰 단점은 자신 이외의 모든 사실을 거짓으로 정의 내린다’는 역설은 하나의 처방전이자 대안이다. 바꿔 말하면, 민족민중미술이 역사적 ‘사건’을 ‘진실’로 규정하고 진실 이외의 모든 사실을 외면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광주’라는 실체의 동일성 맥락에서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진실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제주 4․3미술전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광주’는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 안에 숱한 광주와 제주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이 중요하다. 하나의 시작과 끝은 결코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새로운 광주의 발견은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이고, 실천적 행동주의의 미학담론의 생성지점이다. 뿐만 아니라 독재가 사라진 시대의 글로벌 제국주의, 그리고 탈식민지 논의에 대한 화두도 중요한 이슈일 터이다. 진정 바라는 것은 ‘기억의 자살’이후의 광주요 제주이다.

서구 모더니즘을 아프리카의 확장된 리얼리즘으로 승화시킨 응구기와 씨옹오는 그의 저서 『정치적인 작가들』에 실린 「한국 민중들의 투쟁」에서 “나는 제국주의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평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민족 통일과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와 그 지배 음모에 대한 투쟁으로 이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전 세계 모든 피억압 및 피착취 민중들도 서로 단결해 공공의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정신의 탈식민화』에서 ‘투쟁어’의 재발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의 역사에 관한 모든 담화의 저변을 관통하는 언어는 보편어라 말하며 그것은 투쟁을 기록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투쟁만이 우리를 존재케 한다. (…) 꿈꾸기 위해서 잠자는 민주의 노도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꿈꾸는 민중의 노도 말이다.”라고 설파한다. 우리는 과연 (미술적)투쟁어를 가지고 있으며, 투쟁이 존재하기나 한 것인가. 한낱 그것은 과거의 유산에서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에서 다시 만나다>를 통해 보건대, 25년이 지난 현재에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그 시대 그 작가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보아 온 형식적 틀거리는 마치 박제화 된 미술처럼 생생하지 않고, ‘그 작가들’이후의 새로운 광주에 대한 해석은 어디에도 없다. 그 안에서 신진 작가들의 뜨거운 미학담론의 부재는 이미 예견된 일일 테이고.

왜 ‘그들’은 좀 더 확장된 태도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그들만이 광주를 기억해야 한다고 부르짖는가. 왜 광주는 ‘그들’만의 광주인가. 지금 여기 새롭게 출현하는 20대 30대의 작가들에게 광주를 말하지 못하는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당대 제국주의적 논리에 반박하고, ‘지속가능한 논리’로 밀려오는 생태환경의 비평담론을 확산해 내지 못하는가. 제3세계 노동자를 ‘유색인종’차별로 몰아가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모순을 꼬집지 못하는가. 왜 그러한 논쟁과 미술의 화두는 민족민중미술 진영의 담론에서 벗어나 있는가.

그러한 문제 질의에 더하여 ‘동일성의 폭력’은 반드시 경계해야 함을 지적해야 하리라. 광주와 같은 어떤 사건의 진실은 그것을 중심으로 미술활동을 하는 이에겐 마치 원형(Archetype)처럼 작동할 것이다. 원형이 어둠의 맨홀이 되어 모든 것을 함몰시켜선 안 된다. 원형은 이야기 전개방식의 통로가 되어야 하며, 그 통로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전이되어야 하는 것이다. 박노자가 “한 인간으로 ‘나’는 참으로 소중하고 소중하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나’가 그 무엇의 수단이자 도구로 전락해 있다. ‘국가’의 이름으로, ‘우리’의 이름으로, 때로는 ‘현실’과 ‘진실’이라는 이름으로”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 동일성의 폭력이며, 원형이지 않겠는가.

구본주의 2주기가 다가온다. 그는 <아시아는 지금전> 뒷 풀이에서 이제 ‘민족’이란 말을 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의 죽음은 2년이 지난 지금에도 미해결이고, 곰곰이 생각건대 그의 영령 앞에 촛불하나 세울 수 있을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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