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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21세기, 민중미학의 새로운 기치는 가능한가-에피소드1 : (사)민족미술인협회 창립 20주년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14.

21세기, 민중미학의 새로운 기치는 가능한가
- 예술노동의 침향과 조각, 그리고 리얼리즘 형상성



에피소드1 : (사)민족미술인협회 창립 20주년

22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선 (사)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 창립 20주년을 맞

아 심포지엄과 『민미협 20년사』발간 기념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전국의 민미

협 주요 회원과 평론가, 작가들이 모여 그동안의 활동을 회고하고 향후 민미협의 미

래를 전망했다. 민미협 회장 여운은 발간사에서 “지난 1985년, 강업적인 폭력이 사회

의 모든 부분에서 서슴없이 자행되었던 공안정국 속에서 창작의 자유와 민주화에 대

한 열망에 부응하는 ‘민족민중미술’의 시대적 발언을 기치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까

닭에, 정치권력에 의한 탄압 역시 극에 달해 전시중인 작품이 강제로 철거당하고 작

가가 구속되고, 작품이 억지 해석되는 사태가 수 없이 발생하였고, 이 같은 예술 탄압

과 시련의 중심에는 항상 민미협이 있었습니다.”라며 ‘창작의 자유와 민주화’라는 당

대적 실천담론으로서 민미협의 역사를 반추하기도 했다.



또한 심포지엄 발제자로 나선 미술평론가 원동석은 ‘비판적 리얼리즘’으로서 민미협

의 미학적 지향과 그 활동을 평가하며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

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따져 물었다. 이 말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축사에서 좀 더 구

체적 질의로 다가왔다. 그는 과거 민미협의 민중미술이 마치 제도권미술에 대한 저항

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미술이라는 인식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며, 민중

미술의 목적은 다름 아닌 ‘위대한 미술’에 있다는 것이다. 이때 위대한 미술의 의미

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민중’이라 일컫는 역사의 실체적 구동

체 속에서 맥놀이하며 발아하고 번져 나가는, 민중 스스로의 미술이라는 데에서 그

뿌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날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원동석이 지적한 ‘민중예술운동’의 후

반기에 대한 일침이었다. “초창기 민중예술운동은 자생적 토종성을 확보하였다. 그러

나 그 지평선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사회주의권(특히 북한)에 맞추다 보니 그 독본

에 충실하려는 성급한 실천논리와 관념적 도식성이 예술적 상상력의 빈곤, 형해화를

자초하는, 운동의 후반기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하며 “특히 사회과학의 인식과 사

상 원리에 예술을 종속하였던 사회주의권 교과 독본, 더욱 사회운동의 망명가들, 그

시대 레닌 자처의 젊은 후계자들이 떠드는 사회논리에 예술을 꿰맞추는 방식으로 나

가는, 그 약점을 운동열기에 휩쓸린 예술가들이 판단하지 못한 것”이라 통박했다.




그리하여 그는 묻는다. 그렇다면 민중예술은 한바탕 몰아치고 가는 일과성 태풍에 불

과한 것이며, 서양식으로 들고 나는 유행사조 같은 것이며, 요근래 문화상품 같은 새

로운 자본의 무엇이며, 우리 예술의 토종성을 찾았으면서 마을의 당산나무처럼 뿌리

박고 성장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가 소망한 생

활공동체는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냐고 항변한다. 여운 또한 “그러나 역시 문제는,

오늘 우리시대를 직시하는 미술운동은 어떻게 다시 가능한가?”라고 되묻고 있다.  




백기완 선생은 이날 옛 사람들이 민화를 달리해 부르던 ‘달만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

를 풀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늙은 청년 머슴이 주인집 담벼락에 마님의 엉덩

이를 크게 그려놓고 그 아래 요강을 오줌으로 때리는 그림인데, 주인한테 맞아 죽어

가면서까지 그림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머슴이 죽은 후 머슴 동무들이 머슴의 방

을 들어가 보니, 방 안에는 더 크게 그려진 똑 같은 그림이 있는데, 동무들은, 이 그림

의 내용을 아는 이는 하늘에 휘영청 솟은 달밖에 없다고 하였다. 즉, 달만이 아는 그

림이란 뜻이다. 오줌으로 요강을 ‘텅-  텅-’ 때리는 마님의 큰 엉덩이와 오줌 물줄기

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민미협이 스무 살 청년이 아닌 ‘늙은 청년’에

비유한 듯 하다. 이제 미술운동의 성과나 운운하며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는 그 자리

에서 사자후와 같은 소리로, 도대체 ‘텅- 텅- ’ 울리는 요강소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

는 것이냐고, 깨어 일어나라고 일갈했다.



그 시대의 미술이 비판적 리얼리즘이었는지, 실천적 리얼리즘이었는지, 혁명적 낭만

주의였는지에 대한 견해는 이론가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또한 당시 미술운동이

‘민주화를 위한 탄압과 독재의 저항’이었는지, 제도권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의 대향

미술이었는지, 대중지향인지, 투쟁의 전면에 나선 선전․선동적 예술 활동이었는지

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민족민중미술’의 품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요동치며 선명하게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이 과거형이 우리를 슬프게 한

다. 원동석과 백기완 선생의 호통이 한낱 질타의 수준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

을까 생각되고, 전승보가 질의자로 나서 언급했던 “민미협 생활 20년이 넘었지만 동

생이 없다. 30년 기념식엔 동생이 안 되면 아들이라도 있었으면”하는 바람도 비단 그

의 생각만은 아닐 터이다.



그랬다. 이날 기념식엔 몇몇 민예총 스탭과 울산 회원 김근숙을 제외하면 마흔 살이

막내였다. 실천미학의 담론을 형성하며 현장미술과 행동주의 예술을 펼치고 있는 젊

은 미술가의 얼굴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민족민중미술이 ‘우리만의 잔치’로 끝나지 않

기 위해선 민중미학과 상관하며 현실에 뿌리내린 다종다양한 미술가들을 포용해 지

속적인 담론 생산과 공동의 지향점을 모색해야 하리라. (김종길/문화예술 05-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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