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인을 작가라 할 이유가 없다
문학작품이 감동임을 모르면 예술에서 새로운 길을 갈 수가 없다. 소설이 무언지도 모르며 감동적으로 읽은 문학작품이 한 편도 없었다고 말하는 잘난 사람들, 그네들을 무어라고 설명할까. 소설을 왜 봅니까하는 예술학도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몇 년 뒤를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만화나 영화로 짜깁기 한 오락물일 지라도 열심히 보길 바람이다. 하기사 웬만한 소설들은 다 만화와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시간 바쁘게 일일이 활자를 볼 필요가 있는가. 영화를 보면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이면 고생 안하고 보는데 굳이 원작의 소설을 읽어 무엇 하겠느냐. 그러나 무게와 깊이를 지닌 걸작소설일수록 영화로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는 것이 생생한 의식을 바로 접하는 고급독자의 길임은 기본상식이다. 걸작소설들은 영화로 성공한 적이 거의 빈사상태이니, 역시 소설의 위대함은 종교와 같다 아니할 수 없다. 영화는 일방적 강요와 시간이라는 그 길이에서 절대로 소설을 흉내 낼 수 없다. 소설의 꼼꼼한 묘사와 사건들을 이미지로 전달해야하는 영화가 어찌 소설이 비견할 만 하랴. 세세하도록 기막힌 묘사와 치밀한 사건들을 백치에 가깝도록 생략하면서 만든 영화가 문학의 품격을 결코 따라 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소설은 혼자 보고 영화는 함께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문학의 고급독자라면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경우 원작의 감동이 왕창 무너진 배신감에 무진장 실망했을 때가 많을 것이다. 장편 그리고 대하소설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가 없다. 오직 소설 그 자체를 읽지 않고서는 그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종합예술로 치부한다. 정치도 종합예술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를 거느린다. 영화와 정치는 혼자 할 수 없어서 떼거리로 한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가 혼자서 소설을 쓴다. 그 커다란 우주를 혼자서 만든다. 소설가의 고독을 아는가. 장편소설, 대하소설이 쓰여지기까지 소설가의 무한한 영적인 힘과 사랑과 용기를 아는가. 소설이 인간의 무한한 행복을 만들고 용기와 지혜를 만들고 헌신과 사랑을 만들고 평화와 평등을 만들고, 이승과 저승을 여행하게 만든다. 그 우주를 만드는 소설가를 ‘작+가’라고 하자. 그게 무슨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한국미술인이 유독 <작가>에 달라붙어 명예나 권력처럼 가지려고 하는 그것이 작가라는 칭호인가 말이다. 도대체 암행어사가 아닌 패들이 어사의 마패를 탈취하거나 마패를 감쪽같이 복재 하여 어사로 위장해서 어쩐다는 말인가.
나는 감히 말한다. 소설이란 도덕을 모르는 인간은 예술을 함부로 거들먹거리지 말라고, 자격도 없고 예술가일수는 어림반푼도 없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작가라고 스스로 말하는 미술인의 이름은 스스로 함정에 빠진 엄청 위험한 짓이라고. 그들의 모든 것은 얼음 조각처럼 녹을 것이며 벽에 부딪친 유리공예처럼 산산이 파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인은 이제까지 너무도 쇼에 익숙해져 있다. 그 모순된 행위를 미술은 사과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미인이 작가라 하는 것은 고의성이 다분한 몰지각한 행위다. 그것은 절대 언어의 착오로 인한 실수가 아니다. 미인이 사회의식에 무지(문외한)하다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대처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예술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도덕성에서 월등히 우위를 점한다고 착각하여왔다. 만약 미인들이나 그 주위에 사람들이 이 작가라고 하는 고의성이 다분한 파렴치한 행위에 대하여 충격을 받지 않으려 한다면 그건 아주 위험하다.
나는 미인들이 충격을 받길 원한다. 물론 미술 위에 기생하는 온갖 잡인들은 행위를 사과하지 않음이 당연하다해도, 미술은 분명한 사과가 필요하다. 사과에는 일본무사처럼 할복자살로 사과하는 방식도 있고, 닉슨처럼 현직 대통령직을 물러나는 것도 있으며, 백담사에 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냥 앞으로 <작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않으면 문제될 게 없다.
우리는 국민의 정신을 좀먹는 어떤 집단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없다. 작가라고 위장하는 집단은 국민의 세금을 교묘히 축내는 위정자들의 정신을 닮을 수도 있다. 일반의 국민들을 업수이 여기려는 <작가>라는 그 방법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영원한 강을 만들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한국현대사에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지식에게 길고도 쓰린 상처를 안겨 줄 것이다. 미술이란 고무인간처럼 천박한 자본에 기생하며 지식을 엄청 업수이하며 악용하였던 증거들은 너무 많다. 그러나 한국에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 중에서 미술을 재단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대문필가인 작가들은 너무 인간적이랄까. 아무튼 방임하였다. 그러니 다른 자들은, 미술이 기고만장하는 그 앞에도 그 누구 하나 말을 못했다. 미술은 점점 몸뚱이가 불어나는 ‘작가’라는 거식(巨食)동물로 성장되었다. 어떤 수작? 이나 어떤 짓거리? 어떤 변태? 도 예술이란 이름으로 면죄 받는다는 착각 속에 뭣대로 행동한 사건들이 신문과 방송을 잘 도배하여 왔다.
미술은 성역이자 성역이 아니다. 작가라고 하는 고의성이 다분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이기의 집단논법이다. 자성은커녕 몰지각한 허구는 말[언어]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정말 예술을 하는 분-이라면 작가라는 면류관을 벗어라. 누가 네게 작가라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던 자 보지 못했다. 실수와 책임은 분명히 구분해라. 실수와 책임이 무언가는 아래의 예를 보면 이해가 되리라.
호주의 과학성장관이던 피터맥고란은 수백만 달러의 거부[甲富]임에도 1500 호주달러의 여행경비를 잘못 계상하여 사임하였다. 그는 “분명한 실수였다. 그러나 그 실수가 국민세금을 축내게 만들었기 때문에 기꺼이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닉세리 연방 상원의원도 겨우 1800달러(22만원)정도의 여행경비를 잘못 계상하여 문제화되자 손목-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해 절명 직전까지 갔었다. 호주는 워낙 넓고 의회가 자주 열려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수였다고 해서 책임을 면하지는 못한다. 실수는 인정하되 그 실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함으로써 국민의 세금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는 호주의 시민정신과 정치, 그 뒤에는 의회행정처 직원들의 과감한 폭로와 야당의 집요한 공격이 정의를 바로 세웠다고 한다.
미인이 지식인인가 . 미술대학이 지식인인가 . 미인이 지성인가 아니다. 미술대학의 교수가 지성인인가? 미술에 있어 예술가라 하는 사람이나 미술대학에서 실기를 가르치며 평범한 미술사를 가르치며 지식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 스스로 최고의 지성임을 착각하는 교수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문학과 예술의 성지 프랑스를 보라. 한 때는 프랑스 말을 할 줄 모르는 유학생은 학위도 주지 않았다. 지식인의 정의 내림, 작가의 정의내림이 이 땅에서 얼마나 개판인가는 앙드레 말로가 팡테옹에 안치된 것과 프랑스 지식인 사전의 출간에서 풀어보자.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 ‘위대한 인물들의 안식처인 팡테옹에 안치되도록 결정 났다. 문인으로서는 볼테르, 장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에 이어 다섯 번째요 5공화국으로선 7번째로 팡테옹에 들어가게 되었다. 말로는 <안간의 조건>과 <희망>등의 한국민에게 친숙한 작가(미술인이 생각하는 수준의 작가가 아닌)이며 철저한 반 식민주의자요 반 파시스트주의자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항독 레지스탕운동의 전사이며 아울러 드골 정권의 문화부장관도 지냈다. 말로는 죽음 속에서 프랑스 지식인 사전명단에 오르는 유일한 정치적 경력을 가진 지식인이다. 프랑스 지식인 사전은 지식인을 정의 내림에 있어 정치적 경력을 선택하지 않은 참여(앙가주망)에 가치를 선택했다. 아울러 정치적 경력을 선택한 지식인은 명단에서 모두가 제외되었다. 다만 말로만이 위대한 작가이자 위대한 항독 레지스탕 투사로써 명부에 등재되었다. 참여 지식인, 참여라는 수식어를 부치지 않아도 지식인이란 사회에 대한 참여를 자신의 학문에 대한 천작으로 뒷받침하는 자가 아니던가. 사회참여와 사회적 책임은 지식인의 등급을 가를 수 있는 잣대가 아니던가. 아울러 진리를 추구하는 도덕적 특성의 구현체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지식인이란 주장도 팽팽하다.
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 장에 따라 간다고 남이 지식인하고 지성인 하니까 모방에 천재들인 약삭빠른 자들이 모두 자신들을 지식인이나 지성인으로 거들먹거리고 그 짐-값 따라 무리 전체가 무조건 <작가>랍신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작가를 작가라 하니 미술이 여름밤 개구리 울어재끼듯 작가작가 한다. 미인은 미인일 따름이다. 오직 미술인이다. 미술인은 참으로 위대한 예술의 황당한 길을 가기위해 살신성인일 지라도, 미술이 사회에 거들먹거릴 위대한? 이유는 없다. 작가라는 벌거숭이 임금의 옷을 입어야 할 이유는 더 더욱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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