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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컬처뉴스, 현실미학의 비판적 육성을 들어라!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2. 1.

현실미학의 비판적 육성을 들어라!
[전시리뷰]이종구의 오지리 미학과 현실주의 의미론


[김종길 _ 미술평론가, 컬쳐뉴스 편집위원]

 


지금, 갤러리 ‘학고재’에서 이종구의 <국토, 세 개의 풍경>이 열리고 있다.(1) 1976년 <이종구 습작전>이후 1982년 미술동인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의 창립동인으로 참여하고, 1986년 ‘그림마당 민’에서 <땅의 사람들>로 본격적인 민중미술을 발표해 온 그는, 그동안 1994년 ‘가나미술상’ 수상과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2005년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는 등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20여 년 동안 미학적 공간이었던 고향 오지리에서 나아가 ‘국토’ 연작을 시도하고, 민중미술의 시선을 세계적 지성으로 확장한 <주인을 찾습니다-이라크․이슬람 기행전>(2003), <두 개의 방: 대추리-바그다드>(2006) 등은 그의 현실주의 미학이 어떤 절정에 와 있음을 목도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선 농촌의 가장 당면한 문제로 부각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을 ‘한우의 초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검은대지’연작은 한층 농익은 화법과 언어로 새긴 시대의 암각화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 외 ‘살림’과 ‘만월’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이 땅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만월’의 작품들이 풍경의 보석처럼 빛나는 것은 그곳들이 모두 ‘미륵’의 여명을 간직한 상징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참여했던 ‘임술년’과 오지리를 통해 완성한 ‘현실주의 미학’, 그리고 <국토, 세 개의 풍경>이 남기는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982년, 남한의 현실과 ‘임술년’의 출현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 ‘임술년’은 1982년을 말하고, ‘구만팔천구백구십이’는 1982년 당시 남한 국토의 총면적을 뜻한다. 2008년 기준 남한의 국토 면적은 10만32㎢이니 27년 전 남한의 국토는 지금 보다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하여, 임술년 간지(干支)와 면적이 상징하는 바는 ‘지금(1982년) 이곳(남한의 땅)’이라는 당대적 절실함 혹은 구체적 실존자각을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는 ‘임술년’(1982)이란 시대성과 ‘구만팔천구백구십이’(우리나라의 총면적수치)란 장소성, 그리고 ‘~에서’란 출발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즉 “지금, 여기서”라는 소박한 발언인 것이다.  -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 창립선언문 중

1982년 10월,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이하 임술년)라는 다소 긴 이름의 미술동인은 관훈동의 덕수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열었다. 이종구를 비롯해 박흥순, 송창, 이명복, 전준엽, 천광호, 황재형 등 중앙대 동문들 중심으로 결성된 7인의 이 동인은 1987년 해체를 선언하기까지 비판적 현실인식을 극명하게 표출해 냈다. 그들은 창립선언문에서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의 수용과 가치관의 성찰, 그리고 새로운 전통의 모색이 필연적”임을 강조하며, “우리가 갖고자 하는 시각은 이 시대의 노출된 현실이거나 감춰진 진실”이라 밝히고 있다. 선언문 내용에서 살필 수 있듯이 <임술년>동인들은 ‘현실’에 대한 미술적 모색이 주요한 미학적 테제였음을 인지할 수 있다.

 

창립전이 끝나고 이듬해 봄, 이종구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장․3.25㎡상황>이란 작품으로 차석을 수상했는데, 그는 『중앙일보』(1983.5.7)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가 본 현실, 그리고 현실에 살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 앞으로 더 현실적인 이미지를 형상화시키겠다”고 당차게 발언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현재적 시간만이 존재하는 추상공간이 아니라 그 시대와 민중적 삶이 역사적 사건으로 공존하는 체감공간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의 ‘현실’은 대상화된 공간의 미의식을 벗고 완전히 그 대상으로 포복해 들어간 현실, 있는 그대로의 실체, 허구적 인식을 뛰어넘는 ‘앎’의 순수한 날것이어야 했다. 1983년의 <장․3.25㎡상황>이 1970년대의 회화적 이상으로서 -형식적인 측면에서- 극사실주의 도시풍경이었다면, 1984년 <임술년>동인전에 출품한 <연혁(조부)>와 <연혁-아버지>는 비판적 현실주의의 사실성이 현실미학의 뿌리로 새롭게 영글기 시작한 내부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그로부터 25년 동안 작가 이종구는 그의 고향 ‘오지리’를 통해 현실미학의 테두리를 확장해 오면서 그만의 독특한 민중미술의 숲을 일궈냈다.


농촌의 현실이 응결된 오지리 미학  

1970년대 말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의 바람이 단색조 화풍의 시대를 흔들 때, 청년 작가들은 새로운 예감을 받아 들이 듯 하이퍼리얼리즘의 형식미학을 차용했고, 이종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삶과 예술이 분리되었던 것을 통합한 뒤 그것을 묶는 고리로 ‘현실’을 상정하고, 다시 그 ‘현실’을 미학적 화두로 깨치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졌다. 통상적으로 형식과 내용을 작품 컨셉의 두 축으로 본다면, 이종구의 회화적 개념은 그의 고향 ‘오지리’에 집중 되었다. 단지 오지리의 풍경이 아니라 온갖 부조리한 모순의 실체로서, 나아가 이 세계의 구조적 해체-세계화의 폭력이 미치는 현장이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맨홀이고, 그래서 미적 표현의 형식조차도 오지리에서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임술년>의 이종구가 지향했던 미학은 ‘오지리 미학’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제3세계 국가의 마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한의 작은 마을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이 가장 끝지점에서 일렁이는 파고의 해안가였다. 이종구는 오지리를 통해 이 현실 세계의 이면을 갈파했던 것이다.

오지리 미학의 형식적 변화는 캔버스를 쌀부대로, 도시풍경을 오지리의 풍경과 인물로 바꾼 것에서 일차적으로 찾아진다. 1983년까지 그는 ‘캔버스에 유채’를 썼다. 그러나 오지리의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캔버스가 부적절했다. 오지리의 현실은 오지리의 오브제에 의해 표현되어야만 했다. 오지리는 지극히 평범한 농촌이었고, 그의 뿌리는 농부였다. 그가 처음 오지리로 회귀한 뒤 선택한 주제는 ‘가족사’였는데, 농부의 가족사는 바로 그것, 즉 ‘쌀부대’에 그려져야만 했다.

내가 농부를 그리면서 미술재료인 캔버스나 고급종이 대신 헌 쌀부대를 화폭으로 사용한 것은, 검게 그을린 노동하는 농부의 진솔한 초상을 화려한 재료에 함부로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거니와 농부의 삶과 유기적인 재료로써, 그리고 현대미술의 개념인 오브제가 가지는 상징성과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3)

 


대지를 일구는 농부들처럼 화가 이종구는 쌀부대에 ‘현실’이란 미학을 심고 가꿨다. 쌀부대에 그린 첫 작품 중의 하나인 <연혁-아버지>(1984)를 보자. 화폭이 된 쌀부대는 이미 회화의 대상이 된 ‘아버지’가 아니어도 당대의 시대성과 현실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기호적 인쇄 언어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쌀부대의 앞면 “정부양곡 찐보리쌀”과 단순하게 디자인 된 보리의 심볼은 25년이 흐른 지금, 과거 가난한 농촌의 상징으로 읽힌다. 뒷면에 인쇄된 “찐보리쌀의 특징”과 함께 “우리 모두 보리혼식으로 건강을 유지하자”는 표어는 깊게 패인 주름과 검게 그을린 피부,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아버지 초상과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적 상징과 은유의 맥놀이가 이종구의 새로운 미학적 테제였다. 화폭이 된 쌀부대는 더 이상 보리와 쌀을 담는 종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회화적 의미를 발산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덧붙인 회화적 장치들은 인쇄된 기호들과 ‘대구’를 이루며 의미파장의 진폭을 상승시켰다. 종이 부대와 달리 <오지리 김씨2>(1986)처럼 비닐 부대에 그린 회화도 다르지 않다. 녹색 활자로 인쇄된 “정부수매양곡” 양 옆으로 그려 놓은 ‘김씨’와 ‘소’는 정부의 수매를 믿고 농사를 지어야 했던 한 농군의 팍팍한 노동을 떠오르게 한다. 이 규격 부대 몇 개를 채워야 자식 공부며 가족 살림을 해 나갈 수 있을 런지…. 마른 논의 갈라진 흙처럼 쩍 터져버린 오지리 김씨의 주름과 어두운 낯빛이 비닐 부대의 씨줄날줄에 걸려 고심에 빠져있다. <워낭소리>의 소처럼 노동이 삶의 전부여야 했던 김씨의 소도 살팍진 구석이 없다. 그럼에도 이 쌀부대에는 당당히 ‘검’이라는 검인이 박혀있다. 김씨에게 있어 노동의 잉여가치란 쌀의 수매가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묵묵히 웅변하는 듯하다. 이렇듯 이종구의 ‘쌀부대 회화’는 ‘쌀부대’라는 오브제의 생생한 육성과 함께 혼합되어 ‘현실’이란 리얼리티를 뚜렷하게 구현해 냈다.

 

오지리 풍경과 인물에 대한 묘사는 오지리 내부로 수렴되지 않고, 당대 현실과 시대가 투영된 남한의 농촌으로 확장된다는데 의미가 있다. 칠레나 멕시코, 인도네시아와 몽골의 농촌풍경 또한 오지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지역적 특수성에 의한 상황의 시차적 관점은 다르겠지만, 거대 자본 권력의 신자유주의 망령은 내부의 합의와 저항조차도 무력화 시키면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분단국가로서 이데올로기 노선 투쟁과 탄압이 일상화 된 남한의 상황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그 어떤 것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민주적 삶을 지향하는 평범한 요구조차 ‘정치성’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오지리의 풍경은 정치적 풍경이라 할 수 있으며, 인물들도 그 정치적 시선에 의해서만 더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다. ‘농민화가’ 혹은 ‘농촌화가’로 곧잘 불리는 이종구의 예술적 정치성은 오지리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그는 농촌과 농민의 대변자가 아니라 응결된 현실의 언어로 시대의 풍경을 새긴 탁월한 현실주의 작가라 할 것이다. 농민 출신의 화가를 통상 ‘농민화가’라 부른다면, 이종구는 농민화가가 아니다. 오히려 “농촌 생활이나 문제 따위를 소재로 한 문학”을 ‘농촌문학’이라 할 때 그는 ‘농촌미술’의 범주에 들 것이다. 농촌미술가 이종구의 정치성이 잘 표현된 작품 중의 하나는 <국토-오지리에서>(1988)이다.

민주화의 들끓는 투쟁에 의해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 해에 치러진 국민의 직접 선거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고, 1988년 2월 25일 제 13대 대통령에 노태우가 취임하였다. 1988년에 제작된 <국토-오지리에서>는 찢겨진 대통령 선거 포스터가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화면 중심에 “국민여러분 감사합니다.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라는 당선사례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선거 얼마 뒤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종구는 쌀부대 종이 위에 실제 포스터와 세계의 이슈를 보여주는 잡지를 꼴라주 하였고, 화면 하단에 세 명의 오지리 어른들을 그려 넣었다. 어른들은 양지 바른 길가에 앉아 선거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벼를 수확했을 1987년의 가을과 겨울 동안 마을은 선거로 들썩였고, 마을 사람 몇몇은 선거에 휩쓸려 지지층 확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자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 와중에도 민주니 독재니 군사정부니 하는 따위의 정치적 관심보다도 더 살만한 세상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고, 농사의 댓가가 제대로 인정받는 세상을 소망했을 것이다. 선거에 동원된 온갖 미사여구의 정책들과 유토피아적 개발 약속이 아니라 ‘농자천하지대본’의 근본을 세워주길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포스터는 찢겨지고 바래졌으며, 환한 낯짝으로 승리를 약속했던 후보들은 빠르게 뜯겨져 나간 자리의 흔적들처럼 잊혀졌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당장 배추 값 폭락과 수세폐지 문제였을 것이다. 농민들의 굵직한 투쟁사를 보면, 1988년 수세폐지 투쟁에서 1991년 미국쌀 수입반대 쌀값보장 투쟁, 1994년 UR협상 반대를 위한 삭발과 혈서 투쟁, 1999년 WTO 반대 농가부채 해결집회, 2001년 쌀수입 개방반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 등 ‘세금’ ‘부채’ ‘쌀’의 문제로 귀결된다. 세 명의 오지리 어른들의 표정에 담긴 근심은 앞으로 닥쳐 올 그런 불안의 그림자와 무관하지 않다. 파탄지경으로 내 몰린 오늘날의 농촌은 이미 그의 회화에서 숱한 징조로 예견되고 있는 것이다.    

 

쌀부대, 그리고 농촌 현실의 정치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오지리 미학 중의 하나는 회화적 완성도를 높이는 그리기 형식에 있다. 1980년의 <조부상>이나 <소리>, 1983년작 <경고>와 달리 1984년부터 제작된 오지리 회화들의 표현 형식은 마치 농부가 호미나 쟁기로 논밭을 갈 때의 느낌을 전달한다. 투박한 흙의 알갱이들이 두렁과 이랑을 만들어 낼 때의 그 느낌 혹은 싸리나무 빗자루로 쓸어 놓은 마당의 느낌이 회화적 질감을 형성하고 있단 얘기다. 옛 그림들처럼 이것을 준법이라 한다면 이는 ‘싸리준법’이나 ‘이랑준법’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붓질들처럼 면을 칠해 쌓아 올리는 식이 아니라 일정하게 그은 선들이 작은 두렁을 이루고, 그것들이 이랑으로 묶이면서 전체적인 형상을 구현해 낸다. 붓의 긋기는 싸리 빗질과 닮아 있으나 상징적으론 산하와 들이면서 대지를 이룬다. 이러한 준법은 최근 작품들에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국토, 세 개의 풍경이 남긴 의미

세 개의 풍경은 ‘검은대지’, ‘살림’, ‘만월’로 표상되는 세 개의 상징을 뜻한다. 그가 제시한 세 개의 상징어는 지금여기의 현실이면서 동시에 과거와 이어져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표상(마음 혹은 의식에 현전한다는 의미에서)’의 맥락을 가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세 개의 표상언어를 통해 이종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2008년에 제작된 ‘검은대지’의 작품 주제는 ‘한우’다. 한우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과 맞물린다. 주지하듯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자 수입을 중단했던 한국 정부는 2006년 “30개월 미만, 뼈를 제거한 고기”를 조건으로 수입협상을 재개하였고, 그때부터 광우병에 대한 관심과 언론보도가 증가되었으며, 마침내 2008년 4월 18일에 “뼈와 내장을 포함한 30개월 이상, 대부분의 특정위험부위를 포한함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이 체결되자 ‘광우병 논란’이 일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2008년 5월부터 12월까지 인터넷을 통한 이명박 대통령 탄핵 서명에 138만 명이 참여했고, 6월 10일에는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를 통해 쇠고기 수입반대와 재협상이 요구되었다.

‘살림’의 언어들은 ‘검은대지’와 많은 부분 중첩된다. <내 땅에서 농사짓고 싶다-대추리의 기억>은 <검은대지-무자년 여름>의 경우처럼 인물과 비행기의 상징을 통해 강제 이주에 대한 오마주를 재현하고, <풍경-봄,여름,가을,겨울>처럼 대지는 델타항공이 뒤덮은 그림자에 의해 검게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눈에 띄는 작품은 <빨래>연작이다. 일명 농부들의 유니폼인 몸뻬와 추리닝, 꽃무늬 셔츠에서 뚝뚝 떨어지는 옷의 눈물은 화면 귀퉁이에 붙여놓은 지적도와 토지대장에 의해 그 의미가 증폭되고 있다. 농토의 주인이 도회지 큰손들로 바뀌면서 농민들의 삶터가 붕괴직전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빨래 연작은 농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상실과 실존을 은유하기에 색의 선명함이 더 강렬하게 부각되고 있다.    

 

흰 보름달 아래 펼쳐진 검고 투명한 풍경 ‘만월’은 예지적 전망의 언어를 타전한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만월’의 검은 대지는 소가 딛고 선 투쟁의 대지와는 사뭇 다르다. ‘만월’에 녹아 있는 풍경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 곳은 두텁게 쌓인 유구의 역사와 신성한 기운을 간직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만월 아래에서 수천, 수만의 세월을 견디며 풍경의 영성을 이룬 이곳과 그래서 이 땅의 민중들이 곱게 새겨놓은 ‘모심’의 흔적들을 채굴했다.

 

<삼존불>을 보자. 이 삼존불은 서산마애삼존불이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이 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강당골 계곡의 절벽에 있다. 가야산의 끝자락인 수정봉 북쪽 산중턱에 위치한 큰 암벽을 안쪽으로 파내어 고부조로 새겼는데,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또한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삼존불의 발견과정에 대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터 조사차 이곳에 왔다가 나무꾼에게 부처님이나 석탑 무너진 것을 본 일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무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 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여래(如來)가 누군가. 그는 “진리에 따라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가. 삼존불 중앙의 여래는 석가모니 부처이며, 그 옆에 미래불인 미륵이 앉아 있다. 40여년 동안 보호각에 갇혀 있던 삼존불이 지난 2006년 보호각이 철거 되고 제 모습을 보였을 때, 여래의 미소는 세상으로 스미기 시작했다. <부여-잠자는 부처>에도 세월을 견딘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몇 아름으로 나무를 잴 수 있을까? 나무는 푸른 어둠으로 빛나는 신성을 내 보인다. 손장섭이 그린 나무들이 ‘신목’의 ‘빛울(光背)’을 발산하듯이 이 나무도 그런 기운을 내장하고 있다. 백제의 도시 부여는 웅혼하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하여 백제불교의 문화적 정신은 현대인에게 문명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치유하는 영적 가치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이종구의 만월은 우리 풍경이 보여주는 그런 내적 치유의 장면들이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문명의 야만이 결코 뒤덮을 수 없는 장엄한 역사적․신화적 풍경들이다. 그러나 그 풍경은 역사의 무게 따위의 중압감이 아니라 나무꾼의 소박한 현실적 시선일 때 더 명징하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가 국토풍경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낱 생명들의 모심과 ‘살림’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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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기간은 2009년 3월 4일부터 4월 26일까지
2>『2008년도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연차보고서』(국토해양부. 2008) 참조.
3> 이종구, 『땅의 정신 땅의 얼굴』, (한길아트, 2004), 70쪽
4>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자료 참조. 서산마애삼존불상의 소재지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이며,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편집 : [안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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