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이 삼백여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와 한양, 아니 서울을 본다면 무엇을 화폭에 옮겼을까? 워낙 여행을 좋아해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던 진경산수화의 대표주자 겸재는 특히 한양 근교의 경관을 빼어나게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4일(토) 민미협 작가들과 함께 한양풍경을 그린 겸재의 그림을 손에 들고 서울 구경에 나섰다. 이들은 현대적인 진경산수화를 그리기 위해 겸재의 발자취를 쫓아 인왕산과 창의문, 절두산 및 아차산을 차례차례 밟아나갔다. 이번 답사에 참가한 작가들의 현대판 진경산수화는 오는 22일(수)부터 28일(화)까지 인사동 학고재에서 만날 수 있다.
일행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청와대 앞 광장이었다. 인왕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청와대 앞이란다. 이날 길라잡이를 맡은 박흥순 작가는 경복궁에서 청와대 정문 쪽으로 난 작은 길을 달릴 때 "여기서 차를 멈추면 발포한다더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해 차 안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저마다 한 손에는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다른 한 손에는 디지털 카메라, 혹은 스케치북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조망이 쉽지는 않았지만 밝은 날과는 또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인왕제색도>가 이 쪽 산자락을 그린 것이다, 아니 저 쪽 산자락을 그린 것이다, 라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우선 인왕산 자락과 북악산 자락이 마주치는 골짜기 능선 위에 자리잡고 있는 창의문에 가보기로 했다.
일명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창의문은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다. 교통로로 시작한 창의문은 왕조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폐문되기도 했으며, 인조와 의군들이 이 곳을 부수고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기도 했다. 또 임지왜란 때는 불에 타 심하게 훼손되기도 했었다.
지금의 창의문은 지형이 많이 변해 겸재의 <창의문>처럼 굽이치는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았다. 잘 닦여진 길을 올라 창의문에 다다랐을 때 일행을 맞은 것은 창의문의 고즈넉함이 아닌 군인의 고함소리였다. 아무래도 청와대 담장을 끼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경비가 삼엄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인왕제색도에 군인을 그려넣으면 현대판 인왕제색도겠군”이라고 농을 던졌다.
창의문을 거쳐 청운중학교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청운중학교는 정문이 높은 곳에 있고 교정으로 들어갈수록 낮아지기 때문에 비교적 인왕산자락을 잘 볼 수 있었다. 류영복 작가가 먼 산자락을 함참 올려다보고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창의문>을 번갈아 들여다보더니 “저쪽에서 그리셨구만”이라고 외쳤다. 처음 갔었던 청와대 앞에서 무궁화 동산 쪽으로 펼쳐져 있는 산자락, 바로 그곳이 <인왕제색도>에 나온 산자락이라는 것이다. 일행들은 서둘러 무궁화 동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무궁화 동산에서도 조경을 위해 심어놓은 높게 자란 나무와 뿌연 안개 때문에 그 장관을 명쾌하게 볼 수 없었다. 제자리 뛰기를 해서라도 좀 더 많이, 넓게 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게다가 산자락 밑에 자리잡고 있는 건축물들 때문에 이전의 인왕산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겸재의 ‘진경’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아쉽지만 일행은 인왕산을 등지고 겸재의 <행오관어>, <귀래정>, <낙건정> 등의 모델이 된 행주산성 주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금의 행주대교가 있는 곳에 겸재의 인척이 별장을 가지고 있어 그 곳은 특히나 겸재가 자주 찾던 곳 중 한 곳이라고 한다.
일행은 예전의 겸재가 그랬듯 한강을 보며 배를 채우고 술잔을 비웠다. 한량이 된 듯 나른하게 경치를 즐기던 일행이 채비를 꾸리고 다시 찾은 곳은 현재 강서구 개화동에 자리잡고 있는 개화산의 약사사다. 겸재 당시에는 주룡산 개화사로 불렸기 때문에 겸재의 그림명은 <개화사>다. 산자락에 묻혀 있는 개화사와 그 밑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강과 나룻배가 한 화면 속에 있기에 일행들은 겸재가 분명 행주산성 위에서, 혹은 그 부근에 배를 띄우고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더불어 “우리도 다음에는 배타고 답사하자”라고 장난스럽게 외치기도 했다.
<개화사>를 들여다 보던 일행 중 한 사람이 산에 비해 훨씬 크게 그려진 개화사를 보고 겸재의 그림이 상상화 같다고 우스개를 던지자 김미혜 작가는 “결국 진경산수는 마음과 정신의 문제 아니겠느냐”고 받았다. 또 옆에 있던 정세학 작가는 “그 양반이 더 현대적이지 않느냐”며 “아니, 봐봐라, 진경을 눈으로 보면서도 마음 내키는 데로 그리지 않았느냐”고 너스레를 놓았다. 일행은 건너편, 그러니까 겸재가 <개화사>를 그렸을 지점인 행주산성을 한참동안 건너다 보았다.
다음 목적지는 지금 마포구 합정동 145 외국인 묘지 부근인 절두산 일대였다. 절두산은 명칭 그대로 머리를 잘랐던 산으로 대원군이 이곳에서 천주교도들을 가혹하게 처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절두산 밑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이전에는 바로 한강이어서 자른 목과 몸통은 바로 물 밑으로 버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겸재의 <양화진>을 보면 더없이 고즈넉하고 한가로워 보일 뿐이다.
일행 중 몇몇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두시영 작가는 먹물을 담아온 통을 꺼내 붓을 적시고 절두산의 깍아지르는 경사를 화폭에 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박흥순 작가가 스케치북에 굵고 가는 선으로 절두산을 그렸다. 그들의 그림은 아직 미완이기는 했지만 겸재의 <양화진>의 정서와 묘하게 닮아있었다.
‘겸재의 한양풍경을 찾아서’ 답사코스는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일행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겸재의 <광진>의 모델인 아차산까지 가기로 했다. 마포에서 아차산까지 가는 길에서 들은 저마다의 어릴 적 경험담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읽는 듯 했고, 그들이 살았던 서울의 거리와 사라진 나룻터들이 멀리서 어렴풋이 살아나는 듯 했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하는 말이 “서울이 너무 변했다”이다. “아파트 없는 풍경을 그릴 수 있었던 겸재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냐”는 말이 단지 겸재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드디어 아차산이 보이는 천호대교에 다다랐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위험을 무릅쓰고 차도에 올라섰다. 현재 워커힐 호텔과 워커힐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아차산에는 그 옛날 한강을 건너는 큰 나루 중 하나인 광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겸재의 <광진>과는 너무도 다른 아차산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삼백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느껴졌다. <인왕제색도>부터 <광진>까지 다시 한번 그림을 훑어 보았다. 같은 곳을 보면서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그림 속의 정취가 그리워 졌다. 이심전심인 듯 일행은 차에 오르는 것을 미룬 채 강 건너편을 하염없이 바라다 보았다.
<컬쳐뉴스 / 태윤미>
답사 참여작가
박흥순,김천일,배인석,전진경,김성건,두시영,나종희,김성수,정세학,유연복,
박충의,이윤기,이상권,김미혜
진행:이윤정 /컬쳐기자:태윤미
'민미협 아카이빙 > 2000년~2009년대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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