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이원석 개인전에 초대합니다.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21.

이원석 조각展

 

2006_1115 ▶ 2006_1121









초대일시_2006_1115_수요일_05:00pm








목인 갤러리

서울 종로구 견지동 82번지

Tel. 02_722_5055

www.mokinmuseum.com








욕망의 현존, 그 삶의 리얼리티-이원석 조각에 내장된 리얼리티의 의미론 ● 빈방은 이름 없이 죽은 꽃과 같다. / 입멸의 모든 불꽃은 하얀 재를 남긴다. / 꽃의 이름은 다만 그 부스러기, / 소리를 모으고 색을 불러 만든 돌, / 그 황금 사리의 껍질에서 꽃이 핀다. / 흰 방은 다시 정의 된다. ● 조각가 이원석의 작품들은 삶의 리얼리티(reality)를 반영한다. 그러나 리얼리티의 의미가 시각적 사실성에 머물러 단순히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따위의 ‘재현’에 머무르거나 혹은 해부학적 신체를 극대화시킨 인체 조형론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의 리얼리티는 지극히 내면화된 인간의 심리적 행태와 그로 인해 돌출되는 어떤 행위의 장면성에 있다. 물론 이를 위한 재현과 인체 조형론의 규범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우리가 그의 전시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전시공간의 기획과 작품이미지를 매우 극적인 상황으로 연출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구획 안에서 의미 맥락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한다는 점이다. 즉, 관객이 관자로서 일정한 거리를 갖는 것을 거부하고, 작품과 작품 사이로 파고들어 의미의 파장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리얼리티의 서사를 몸 전체로 이해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략 구상의 성취를 위해 그는 조각이 갖는 조형의 품격 내지는 엄숙주의를 버리고 과감히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소시민의 표정을 ‘사실감(바로 이것이 리얼리티)’있게 표현한다. 필요에 따라 과감히 채색을 하거나 전기 동력을 이용한 조각의 움직임 장치를 구현함으로써 장면 전환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 두 번째 개인전은 ‘행위의 장면성’ 또는 상황극과 같은 전시 연출을 좀 더 섬세하게 기획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훨씬 정제되고 상징화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목인갤러리의 개성적인 전시공간을 ‘방’ 개념으로 풀어 현대 사회에 내장된 가족의 파편적 행태와 욕망, 그림자를 들춰낸 것은 탁월한 작가적 시선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그의 전시개념을 희곡의 장면 개념으로 전환해 해제하고자 한다.






이원석_황금개의 콧방귀_모터동력, 혼합재료_가변설치_2006





이원석_점점 자라나다_모터동력, 혼합재료_가변설치_2006


콘과 목의 공간: 여섯 개의 방 ● 21세기형 포스트 모던 건물이 들어찬 인사동 청석골길 한쪽에 그 옛날(1955) 인수당 한의원으로 쓰던 목조건물(이하 목)이 뒷짐을 지고 앉아 있다. 그 옆에 나란히 기대어 있는 콘크리트건물(이하 콘)도 별반 도시형은 아닌 듯 고령의 연륜을 엿보인다. 담쟁이 넝쿨이 온 몸을 휘감아 올린 것을 보면, 어느 한 세월의 비밀스런 서사를 간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마당에 이르면 옛 돌조각 몇이 마중하는데, 마치 뒤란의 산대 숲처럼 담을 끼고 자란 나무들이 제법 운치를 더한다. 도시 한 복판에 열리지 않은 신화의 소(沼)? ● 두 건물을 잇대어 갤러리를 열었으니, 밖으로는 창(窓)이 하나요, 안으로는 문이 하나다. 들고 나는 문은 콘에서 시작되는데, 이 건물의 안쪽 공간이 관객 동선의 선행적 행태를 제한한 후 두 번째 공간 즉, 목으로 이동하게 된다. ● 우선 콘의 공간을 보자. 다듬이 돌 정도의 계단이 있는 현관문을 열면 널찍한 거실이 펼쳐진다. 현관에서 바라보면 거실 오른편에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고, 다시 거실 뒤로 작은 방 하나가 있다. 이 방과 방 사이에는 통로가 있어서 위층으로 올라가거나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다. 오른편 첫 번째 방은 프론트 공간이나 작품을 설치할 수도 있다. 세 번째 방은 화장실이다. 가운데 콕 박혀 있는 작은 방을 극적인 장치로 활용할 수 있을 터이다. ● 목은 현관 왼쪽의 거실 모퉁이에서 곧장 연결된다. 하지만 지대가 콘보다 낮아 두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목은 목(木)답게 바닥과 천정이 나무로 되어있다. 공간의 분위기는 콘과 달리 아늑하고 깊다. 또한 이 공간에는 네 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 사이 바닥 면 중앙에는 사각 둘레의 방호공간이 1m정도로 파여 있어 때에 따라 실험적인 작품설치가 가능하다. 각 공간의 모든 벽은 하얗다. ● 거실: 황금개의 〈콧방귀〉 ● 콘의 현관을 열고 들어선다. 우리는 거실 모퉁이에 둥지를 튼 무지개 빛 피라미드를 발견한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리라는 신의 언약, 그 무언의 징표가 물신의 욕망으로 둔갑해 탑이 되었다. 무지개라는 길상(吉祥)의 기복적 메타포가 천년 여우로 둔갑해 똬리를 튼 것일까, 방안은 온통 무지개의 현란한 색들이 천원권, 만원권, 수표, 보석 따위로 옷을 벗는다. 너무도 투명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렇듯 정신 혼잡한 탑의 현란함이 신을 향한 문인지, 아니면 하늘을 향한 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 탑이 풍기는 더럽고 추악한 자본의 냄새만이 어지러울 뿐이다. ●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땅(현 바빌로니아)에 정착한다.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운다. 그들은 야훼의 심판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무지개를 통해 약속의 표징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들은 야훼를 불신하는 상징으로 탑을 세운 것이다. 하여, 야훼는 마음과 언어를 혼동 시켜 그들을 멀리 흩어지게 하였다. 바벨(Babel), 또는 바빌론(Babylon)이라고 불리는 이 탑의 뜻은 “그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이다. ● 우리가 이 무지개 빛 피라미드에서 발견하는 징표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느 땅에 정착해 있으며, 이 방은 누구의 방인가. 과연 우리가 불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듯 이 방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 신도 사람도 그런 ‘나’를 멀리 흩어지게 하지 않는다. ‘내’ 언어는 혼잡하나 ‘내’ 눈은 색에 중독되어 있고, ‘내’ 몸은 이미 자본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길들여진 나. 그렇다! ‘나’는 개다. 충실한 자본의 개다. 아니, 개가 자본이다. 개가 나의 신이요, 주인이며, 우상이다. 저 무지개 위에 온 몸을 긴장시켜 부르르 떨고 있는 몸짓, 앙 다문 입, 핏발 선 눈, 꼬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맵시, 근육질의 다리, 아 황홀한 황금빛 털. ● 그 순간, 뽀오옹~, “네미 뽕이다!” 외치며 똥구멍에서 쏟아지는 하얀 똥 방귀, 자본의 괄약근이 툭 터지면서 온갖 천박한 싸구려 허상들이 새 나온다. 그러나 도망치지 마라, ‘네’ 욕망의 언저리 어디에 저 개신이 착 달라붙어 있어서 떼어내지도 못 할 테니. 바벨탑 벽돌을 쌓을 때도 역청을 썼다 하지 않은가!






이원석_무장하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6 /좌

이원석_포만감_명함 들_가변설치_2006 /우





이원석_포만감으로 무장하다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6


작은 방: 아아, 〈고단한 하루〉 ● 어두운 방에 핀 조명이 뚝 떨어진다. 방 입구 오른쪽 아래, 귀퉁이 한쪽에 놓인 대야 하나. 물이 담긴 대야에 침대가 떠다닌다. 우리는 그 침대위에서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고 잠에 든 어느 부부를 만난다. 다만, 대자로 골아 떨어 진 남편의 거시기를 만지며 하룻밤의 애욕을 삼키는 아내의 마음이 슬플 뿐이다. 얼굴과 손발을 씻는 것으로 삶이 정화될 순 없다. 우리는 날마다 대야에 물 떠 놓고, 이렇듯 두둥실 떠다니며 삶의 나락 저편 까지 씻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또 하루를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여다 본 요지경 세상인 양 이 작은 풍경은 발밑에서 빙그르르 돌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20년 전 한 시인이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시를 떠 올렸다. ● “수런대며 발 밑에 모이는 풀잎에 귀기울여도 보고 / 몇 개의 나무 그림자를 안고 저무는 강물을 흐르기도 하고 / 무거운 몸 끌고 서쪽으로 지는 구름 따라가보기도 하였으나 / 당신이 물러서는 발짝만큼 / 나는 당신을 쫓아가지 못하였습니다 / 그늘진 곳에서 반딧불만한 등을 켜고 모이는 사람들과 /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멎는 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밤 / 하나씩 둘씩 마을의 등불은 이울고 / 뻐꾹새 소리만 잠든 마을을 씁니다”- 도종환, 「저무는 강 등불 곁에서」중에서 ● 물 위에 뜬 인생이란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그렇게 흐르기를 마다하지 않고 살아도 삶은 끊임없는 유목일 뿐 쉽게 정주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한 삶을 쫓아가도 그 삶이 온전히 내 삶과 동화되지 못한 다는 사실은 늘 인식이전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 그러나 그 삶도 그렇게 지속된다. ● 어린 방: 풀잎처럼 〈점점 자라나다〉 ● 안쪽의 끝 방, 거실 뒤쪽에서 소리상자의 음악이 들려온다. 발걸음을 멈춘다. 어린 소녀가 바이올린을 들고 ‘동작 그만’ 하고 있다. 소녀의 머리가 천천히 움직인다. 소녀의 머리가 돌아가면서 소리상자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소녀는 아무 말이 없다. 그 앞에 풀이 자라는 플라스크가 있다. 좁은 입구를 향해 자라는 풀, 하지만 성장을 멈췄다. ● 하얀 방, 하얀 아이, 투명 플라스크, 초점 없이 덩그레 떨어진 조명, 우리는 아이와 풀 사이를 오가며 빛의 감옥으로 빨려든다. 그림자에 갇힌 아이의 표정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이곳에서 ‘빈방’의 부스러기와 빛의 줄기를 발견한다. 테레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기억한다면, 로라의 일각수를 비교할 수 있으리라. 자라는 풀 또한 짐 오코너가 로라를 향해 부르던 푸른 장미처럼 말이다. ● 그런데 자세히 귀 기울여 들으면, 소리상장의 멜로디에는 세상의 음울한 잡음이 섞여 있어 마치 소녀의 독백처럼 들려온다. ‘일시정지’의 포즈와 그 틈을 파고드는 소리, 그 시차의 간극만큼이나 큰 수레가 ‘내’ 삶의 한 지점으로 빠르게 곤두박질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이원석_고단한 하루_혼합재료_20 45 45cm_2006





이원석_창밖의 남자_모터동력, 혼합재료_가변설치_2006_부분





이원석_창밖의 남자_모터동력, 혼합재료_가변설치_2006



나무 방: 〈창밖에 스치는 풍경과 이 작가의 댄스 땐스!〉, 그리고 〈포만감〉으로 〈무장하다〉 ● 한 남자가 팬티차림으로 춤을 춘다. 얼큰하게 취해서 손짓하는 폼이 영락없이 권주가를 부르는 걸군이다. 오른손에는 마이크를 들었을까, 아니면 양주잔을 들었을까. 턱 걸친 왼손은 보아하니 노래방 아가씨? 그래, 이 걸군이씨는 지금 노래방에서 한바탕 놀아나는 꼴이다. 아가씨랑 옷 벗기 게임이라도 했나? 얼씬 노랫말을 추적하며 메마른 노랫가락을 주워 삼키는 눈빛이라니,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그런데 지금 걸군이씨, 그 모든 노래와 여자와 술은 어디로 보내고 혼자 남아 우리와 만나는가? 이 엉거주춤한 동작 그만은 또 무어란 말인가! ● 흰색 철 기둥 네 개가 서 있는 목의 저 안쪽 공간, 우리는 그 곳으로 가기 전에 두 기둥을 가린 칸막이 통로를 지난다. 끼고 돌면 세 번째 기둥 옆에 걸군이씨가 서 있다. 저 춤의 포즈 첫 인상이 ‘노래방’인 것은 다만 한 순간의 인상일 뿐, 주춤 거리며 서 있는 포즈는 불편한 시선으로 우리조차 ‘주춤’거리게 한다. 왜냐하면 그의 등 뒤 벽에는 비닐 옷이 걸려 있고, 그 옆으로 한미 FTA ? 대추리 ? 황우석의 얼굴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마치 흐르는 창 밖 풍경처럼 영상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 걸군이씨의 포즈를 다만 ‘춤’이라 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 걸군이씨를 뒤로 한 채 돌아서면, 두 개의 토르소와 만난다. 새까만 털의 밀랍 토르소와 명함을 기워 만든 외투를 입고 당당히 서 있는 토르소이다. 마네킹 봉에 꽂혀 양복점 옷걸이 마냥 허리 곧게 편 채 사방을 응시하는 이 토르소는 기실 걸군이씨의 ‘몸’이다. 그의 ‘옷’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아야만 하겠다. ● 몸 전체에 자라난 털의 속성이란 발기한 성기의 은유일 터인데, 그렇다면 몸 전체가 성욕의 활기충전이요, 야성의 기질로 가득한 남성성의 실체가 아닐는지. 걸군이씨의 내면에는 이러한 욕망의 이면과 비아그라 대용의 정력 보강제가 구름처럼 흘러 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상의 걸군이씨는 명함에 살고 명함에 죽는 샐러리맨이 아닌가! 이렇듯 참으로 기찬 현실의 양면성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란 옷 벗고 노래 부르는 일이다. 다 벗고 춤을 추는 일이다. 아하! 그 때 그와 마주치는 눈빛. 혹시 걸군이씨! ‘창 밖의 여자’를 ‘창 밖의 남자’로 고쳐 불렀우? ● 이 모든 광경을 창 밖에서 눈 알 굴려가며 보는 〈창 밖의 남자〉가 있다. 쉿! ■ 김종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