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20주년 기념 최민화전
2007.6. 7 ~ 6. 24
초대일시: 6. 7 (목) 6:00pm
장소 ; 문화일보 갤러리
오시는길 : 전철 5호선 서대문역 5번출구
역사적 울혈증과 회화적 기억
이 재현(문화평론가) - 최민화의 전시에 덧붙여
벤야민은 <역사철학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가 과거의 이미지를 자기 나름의 관심거리로 인지하지 않는다면 모두 사라져버려서 회복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기억을 붙잡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최민화의 이번 그림들은 6월 항쟁에 관해서 어떤 기억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는 것인가.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역사적, 정치적 울혈증을 안고 살아간다. 가까운 역사의 기억들은 늘 거머리처럼 우리에게 들러붙어 있다. 우리는 이 기억들을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고 이 기억의 망령들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울혈증 치료에 거머리를 썼다는 일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표현 자체가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민화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민화(民花)라는 예명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민중의 꽃’이란 뜻이 아니라 “민중은 꽃이다” 혹은 “민중이 꽃이다”라는 취지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은’과 ‘이’의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작명 취지를, 민중은 역사의 기관차가 아니라 꽃이라든가 혹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민중이 꽃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풀어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양 방향에서의 압력 내지는 끌어당김이 작용하고 있다. 한 쪽에는 역사, 정치, 현실 등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예술, 미술, 회화 등이 있다. 최민화는 이 가운데에서 어느 쪽으로도 연행당하지 않으려고 온 몸으로 버티면서 견디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민중미술 화가들이 군중의 도상을 그려왔지만 최민화가 유독 가두투쟁의 도상적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승리나 패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두투쟁의 정치적으로 극히 고양된 순간, 바로 그 에로틱한 순간에 최민화는 사로잡혀 있다. 최민화의 그림 중에서 시위 현장에서 누워 있는 많은 사람들의 도상은 바로 이러한 투쟁의 에로티시즘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로잡힘, 혹은 예술적 강박신경증이야말로 최민화라는 화가로 하여금 20년에 걸쳐서 6월 항쟁을 그려오게 만든 동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예술적 강박신경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최민화의 반파쇼 기질 내지 취향이다. 이 반파쇼 기질은 다시, 최민화가 지니고 있는 여러 겹의 방랑벽에 이어진다. 그는 늘 길 위에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길 위에서 화염병을 던지려고 하고 있거나 길 위에 누워서 전경의 구둣발에 짓밟히고 있는 그림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말이다. 그가 90년대 초부터 몰두해 있었던 분홍색 연작 회화의 정치적, 미학적 탯줄이 바로 이 고양된 가두투쟁의 에로티시즘인 것이다.
그런데 회화는 본성상 늘 뒷북을 친다. 최민화가 아무리 날렵하고도 가벼운 회화적 터치와 스냅의 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위 행렬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던 거대한 걸개그림을 통해서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익히 선취라든가 예감 등과 같은 미학적으로 그럴 듯한 말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화적 재현이라는 것이 본디 늘 뒷북을 치는 것이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다. 당대의 역사적 기억과 관련해서 살아남은 화가는 계속해서 뒷북을 치면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월 항쟁을 체험한 세대로서는 자신 세대의 역사적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환멸과 사적인 상처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물려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은 단지 그 기억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도리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기억을 물려주려는 끊임없는 행위에 의해서만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튼 내게 최민화의 그림들은 바로 이러한 존재 이유를 분명히 갖고 있다.
반면에, 새로운 세대, 즉 1980년이나 1987년 혹은 1991년 이후에 태어났거나 성년이 된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역사나 기억의 의미가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손 치더라도, 최민화의 그림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혹은 더 나아가서, 최민화의 그림들은 사진 연감에서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이미지들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정치적 울혈증이 없이 탄생하고 성년이 된 새로운 세대는 당연히 최민화 그림들에 대해서 이러한 의문들을 제기할 수 있다.
울혈증에 의한 정치적 심부전(心不全) 증세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의 이러한 물음에게 어떻게 답해야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잘 알 도리가 없다. 역사적 기록과 기억을 둘러싼 숱한 분투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역사란 본디 최종심이 계속 지연되는 법정이기 때문이다. 체험에 의한 기억이 없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우리에게 자명한 기억의 의미나 의의가 그대로, 그러니까, 결코 쉽게나 혹은 편하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단지 그러한 존재의 이유만이 아니라 그 기억의 양상을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 제출된 50여 점의 그림들은 색이나 크기나 테크닉이나 작업 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지만, 그 양상이라는 점에서 크게 세 종류로 나뉠 수 있다. 삽화적 기억들을 도상적, 다큐멘터리적으로 충실하게 기록하려 한 그림들이 있고, 이와는 정반대로 아주 회화적인 방향에서 화가 특유의 변형 작용이나 구성 작용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롭고도 분방한 상상력을 통해 표현한 그림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양자 사이에서 주저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품들도 있다. 이 세 종류 각각 나름대로 음미해 볼 만하다.
최민화 자신이 만족하고 있고, 나도 동의하고 있는 것은 이 세 부류 중에서도 기록적 의무과 회화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만들어진 작품들, 특히 이런 갈등의 절충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잘 빠져나온 것들이다. 이 세 번째 종류의 그림들이 갖는 가족적 유사성은 최민화가 영원한 방랑의 예술가, 혹은 길 위의 화가라는 점과도 연관되며, 최민화가 제시하려고 한 ‘방대한 범주의 분홍색’과도 통한다. 역사-정치적 현실의 압도적인 힘과 회화주의적 유혹 사이에서 버티어 온 최민화의 특유의 정치-미학적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류다.
어떤 사람들은 최민화의 그림들로부터 6월 항쟁의 기억과 관련해서, 정치적 혹은 회화적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최민화의 그림들로부터 이 지긋지긋한 현대사의 시궁창으로부터의 구원의 계기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도대체 이제 우리가 6월 항쟁과 관련해서 어떤 정치적, 사회적 기억들을 공유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라고 아주 심각하게 물을 수도 있다.
나는, 다른 것을 다 떠나서, 20년 동안 작업실에서 하나의 모티브와 싸워 온 화가 최민화에게 경의를 표한다. 최민화는 20년 이상을 계속해서 자신의 역사적, 정치적 울혈증을 회화를 통해 표출해 온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7년 이후에도 우리의 삶을 계속된다. 역사적, 정치적 울혈증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회한, 우리들의 상처와 환멸은 우리들이 살살 달래면서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비바(viva) 민화(民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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