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컬쳐뉴스]금강산에서 평화와 통일을 그리다 -홍선웅 판화가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24.

금강산에서 평화와 통일을 그리다
[기고] 《2007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위한 금강산 스케치 답사기

 

 

금강산은 ‘인간세상의 정토이며 구름과 물로 빚은 살아있는 그림’이라던 청허당, 그 고운 빛 가득한 금강의 신비경을 화폭 안에 녹아낸 조선 화인들의 자취를 찾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기자단을 포함한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 회원 51명은 고성 화진포의 아산휴게소에서 발권한 후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한 다음에야 온정각에 도착하였다. 이어 교예단 관람과 한동민 박사의 ‘불교 속의 내금강’ 강의를 들은 후 외금강 바닷가에 있는 숙소인 금강펜션타운으로 향했다.

이번 금강산 답사는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합동 전시회’로 금년 8월14일부터 23일 까지 부산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있을 《2007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위한 미술인들의 스케치 답사이다. 《2007 코리아통일미술전》은 ‘평화와 화해의 시대에 겨레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상생의 공간이자 평화의 메시지를 보이는 축제의 자리’가 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으며, 2007 8.15민족단합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축하하는 미술행사이기도 하다.

원래 민미협은 1985년 창립 다음 해부터 분단극복과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향한 《통일전》을 주요 전시 기획 사업으로 해마다 추진해 왔다. 이후 1993년 10월에는 《통일전》을 확대하여 남북 미술인들과 해외동포 미술인들이 도쿄와 오오사카에서 만나 《코리아통일 미술전》을 개최 한 바있다.

당시 김용태 남측단장은 북측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고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결의 하였다. 그후 민미협 통일위원회에서는 《코리아통일미술전》의 정신을 이어 받아 지금까지 서울과 인천, 광주, 부산 등에서 전시를 진행해 왔으며, 96년에는 ‘백두산과 고구려유적지 탐방’ 그리고, 지난해에는 범 미술인 단체와 연계하여 ‘북한 어린이에게 물감 보내기’운동도 추진한바 있다.

 

빽빽한 전나무 숲 사이 길을 들어서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아침, 온정각에서 작은 버스를 타고 만향골의 영웅고개를 지나자 구름에 감싸인 관음연봉에서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흘러내린다. 계절폭포인 관음폭포(일명 육화폭포)이다. 급경사인 106굽이 60리길인 온정령 고갯길에 올라 고갯마루에 있는 금강터널을 빠져나오자 비포장도로로 이어진다. 여기서 부터는 내금강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포천과 철원 그리고 김화를 지나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을 탐방하고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외금강까지 유람하는 것이 정코스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비석의 『산정무한』을 보면 일제 강점기 때에는 서울서 기차를 타고와 철원에서 금강 전철로 갈아타고 내금강역으로 왔다고 하니 외금강에서 내금강으로 이동 중인 우리와는 반대코스이다.
 
북한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금강읍을 지나자 해설을 하던 북측의 윤현선 관리원이 먼저 시를 하나 읊더니 파마머리 장발에 미남형인 김운성 민미협 사무처장을 지목하며 노래를 부탁한다.

“찢기는 가슴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 /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에 핏줄기 있다.”

안치환이 부른 <광야에서>를 북녘 땅에서 들으니 모두들 숙연해지는 모양이다. 윤 관리원은 남측 가수들도 많이 안내해 보았지만 이렇게 감동적인 노래는 처음이라며 칭찬이 대단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골풍경은 마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듯 낯설지만은 않다. 구불구불 이어진 흙길과 산비탈에 잘 정돈된 옥수수와 콩밭, 집채만한 검은 냇돌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맑은 시냇물, 그러나 하나 같이 정형화된 똑같은 문화주택과 그 마을 입구를 지키는 앳되 보이는 검게 탄 군인의 얼굴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주민이나 소달구지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감에는 좀 생경한 느낌조차 든다.

한참을 달리니 내금강의 첫 동네인 내강리가 나타나고 계속 이어지는 수려한 소나무 숲길은 자본의 때가 묻지 않은 환상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마치 백자항아리 속에 담긴 맑은 물처럼 청록의 소박함이 대지에 묻어나와 그만 나도 모르게 “아, 통일이 되면 이런 곳에 작업실을 짓고 살았으면”하는 소망어린 탄성이 튀어 나온다.

그런데 그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만천교(옛 향선교)를 건너자 백천동 계곡을 끼고 하늘을 통채로 가린 채  길가에 빽빽이 늘어선 수백년 된 전나무 숲길이 또다시 장관이다. 금강산의 초입인 비좁은 이 전나무 숲길은 작은 버스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인데 그동안 개발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해 준 북쪽 사람들이 정말 고맙기만 하다.

숲길을 빠져나오니  바로 장안사터다. 금강산 4대 고찰 중에서도 전각만 70여 채나 되던 대찰인 장안사가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지금은 개망초 우거진 풀숲에 영운당 부도만 조촐하게 남은 빈터가 되었으니 허망함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러나 석조로 된 거대한 무지개다리가 그려진 겸재의 <장안사>와 <장안사 비홍교>그림은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의 화려했던 옛 모습을 대신해 주고 있으니 이것도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장안사터를 지나 버스가 멈춘 곳은 내금강의 심장이며 법기신앙의 중심도량인 만천골의 표훈사이다. 절 앞 표훈사교(옛 함영교)에서 바라본 경내의 전경은 벌써부터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백옥 같은 크고 작은 바위와 넓은 계곡, 기품 있게 쭉쭉 뻗어 오른 붉은 미인송과 잣나무, 2층 누각인 능파루와 반야보전, 영산전, 명부전, 어실각, 판도방 그리고 병풍처럼 경내를 감싸 안고 있는 백색 암봉인 청학봉과 오선봉, 온통 짙푸른 산색에 둘러쳐진 이 모든 전경이 화폭의 그림처럼 한 시야에 들어온다.

반야보전 앞에서 붉은 장삼을 걸친 채 탐방객을 맞고 있는 진각스님께 다가가 《코리아통일 미술전》을 준비하기위해 스케치답사를 왔다고 하니 반갑게 대해준다. 민미협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옆에 있던 태백에서 온 황재형 화백을 가르키며 광부화가라고 소개하니 간략하게 설명했던 민미협의 실체가 나름대로 각인되는 모양이다. 평양 화가들에 대해 묻자 “만수대창작단도 니곳 내금강에 오면 여기서 여러 날 묶으며 밑그림 그리디요”라고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가랑비가 또다시 스물스물 흩뿌리기 시작하자 이내 시야는 운무로 뒤덮힌다. 7층 석탑 앞에서 스님을 모시고 민미협 회원들과 함께 사진 촬영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하고는 황급히 금강문을 지나 만폭동으로 들어섰다. 

 

절벽난간에 새집처럼 매달려 있는 보덕암

만폭동은 진주담을 비롯해서 구담, 선담등 팔담이 있고 금강대, 보덕암, 묘길상, 정양사 등 비경이 많아 골골마다 불국토에 관한 전설이 많다. 그리고 조선시대와 근대에는 문인묵객들에 의해 많은 작품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서인지 너럭바위 곳곳에는 이름들이 너져분하게 새겨져 있다. 무지한 이런 습성이 지금까지 전해져 해외에 나간 우리 관광객들이 남의나라 집 벽면이나 선인장에 까지 이름을 새겨 망신을 사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들 코스는 표훈사 북동쪽인 보덕암과 마하연터 그리고 묘길상까지 보고 내려와 다시 북서쪽에 자리잡은 정양사까지 답사하는 것이다. 만폭동은 대체로 벽하담, 분설담, 진주담 등 팔담을 중심으로 산수를 즐기게 되어 있어 산을 오르다 보면 스케치를 하는 민미협 회원들도 담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담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벽하담을 지나 분설담에 다다르자 건너편  법기봉 중턱의 절벽난간에 마치 새집처럼 매달려 있는 보덕암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하는 탄성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설폭포 너머 법기봉을 배경으로 산중턱에 위태하게 자리 잡은 보덕암은 마치 찻사발에 핀 한송이 매화처럼 은은한 자태를 보인다. 보덕암을 가까이서 보기위해 허궁다리 건너 수백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니 법당은 3층 모양으로 기와를 얹었고 빛바랜 처마와 문은 이미 낡아 있었다. 허공에 뜬 법당을 구리기둥 하나로 받치고 있었으며 법당이 떨어지지 않게 좌우 석벽에 두줄의 쇠사슬로 서로 엇갈리게 묶어놓았다. 

 

이상수는 <동행산수기>에다 보덕암의 이 구리기둥을 보고 “바위 벼랑에 학의 다리가 붙은 듯 공중에 매달려 있다.”고 적어 놓았고 겸재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은 이 매달린 모습을 “땅은 금을 깔 수 없으나/ 방과 풍경은 모두 매달렸다”고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는 보덕굴 안을 들여다보고는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면서 “이건 사람의 집이 아니라 노루새끼나 수리의 둥지”라고 야유 섞인 어조로 <금강산유기>에 감회를 피력해 놓았다. 운무가 사라진 계곡은 풍요로운 청록 빛 잔치이다. 기와지붕과 맞닿아 있는 마당에 서서 향로봉과 그 아래 만폭동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솔바람을 맞으며 잠시 경치에 취해본다. 회정스님을 이곳까지 인도한 보덕각시와 관음화신의 파랑새 전설은 산바람에 실려와 보덕암을 찾아온 나그네의 허심한 마음 한 구석을 채워줄 뿐이다. 
 
만폭팔담의 마지막인 화룡담을 지나자 전나무 우거진 어두운 숲속에 마하연 이정표가 나오고 마하연 초입인 빈터에는 마하연사적비와 공덕비가 나란히 서있다. 이곳에서 마하연과 묘길상 길로 나뉘어진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마하연은 53칸의 큰절로 나옹선사를 비롯해 율봉, 만공, 청담, 환경, 성철 큰스님등 한국전쟁 전까지 선방수좌의 수행도량 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지금은 기와장과 주춧돌만 나뒹구는 폐허지가 되었으니 칠성각 마루에 걸터앉아 쓸쓸히 흘러간 옛 영화만을 상상해 볼 뿐이다.  

 

소박한 선각의 맛 묘길상
 
다시 길을 재촉하여 묘길상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금강에서 가장 골이 깊은 화개동천이다. 스케치를 다 마친 회원들이 벌써 내려오기 시작한다. 무릎관절이 안 좋은 김건희 선생은 더 이상 올라가기가 힘든지 내려오는 회원을 불러 “봐라, 봐라, 젊은것들이 벌써부터 지팡이 질이냐”며 눈을 흘기며 스틱을 빼앗는다. 빼앗은 스틱을 집고 다시 걸으면서 훨씬 편하다며 웃는 모습이 환갑을 훌쩍 넘긴 사람 같지 않고 해맑다.

여기서 부터 묘길상 가는 길은 맑은 계곡을 끼고 걷는 깍아지른 벼랑 밑 외길인데 사람의 손때가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호젓한 옛 길이서 정감이 넘친다.  얼마를 걸었을까, 장마로 휩쓸려 나간 길을 북한 주민들이 판목을 얹어가며 보수를 하고 있다. “수고 하십니다.”라고 인사하자 “녜, 수고 많씀네다”라고 화답한다. 옛날 같으면 북측 주민을 만나면 말도 걸지 못하게 했는데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축대처럼 쌓아올린 돌계단을 올라서니 거대한 마애불이 홀연히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묘길상이다. 법의를 걸치고 가부좌를 한채 어깨는 약간 들어 올렸으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드리우고 있고 내영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 인데 낮은 평면의 부조에 기교가 없는 소박한 선각의 멋이 장대한 마애불을 수수하고 온아한 품격의 부처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혹자는 묘길상 뒤로 비로봉이 있기에 이 마애불이 비로자나불이 아닐까 유추도 하는데  유홍준은 이 묘길상을 보고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묘길상은 문수보살의 별칭이고 암자 이름이며 이 마애불은 부처상이기에 마애불의 명칭을 ‘금강산 묘길상 암자터 마애 아미타여래 좌상’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내금강 답사의 끝 지점인 묘길상 마애불 앞에서 민미협 식구들이 ‘우리는 통일을 그린다’라고 쓴 프랭카드를 펼쳐들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 매우 감동적이다. 그들의 웃음 속에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애정과 노력이 듬뿍 담겨 있어 보인다. 금강산을 중심으로한 조선시대 진경산수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원동석 선생은 이번 《코리아미술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이며 후배들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작품 갖고 자꾸 만나야혀, 그래야 남북간에 차별성도 회복하고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서로 발전하제. 금강산에서도 남북작가들이 만나 같이 전시 하면 좋제.”
 
비로봉 가는 길은 지금 여기 묘길상에서 비록 막혔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평양 가는 길까지 열릴 날도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는 희망도 보인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하는 북측 안내원과 해설원들의 친절하고 진지한 모습에서, 탐승 길의 짧은 만남의 정을 돌아서며 서운해 하는 그들의 눈빛에서 우리는 결코 둘이 아닌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보았다.

우리 미술인들을 위해 북측에서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정양사 스케치 답사를 특별히 허락해 주어 우리는 정양사로 가기위해 서둘러 하산해야 했다. 

 

 


중앙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민예총 대변인(92), 민미협 20년사 편찬위원장(2005), 합천팔만대장경축제 예술감독(2006)을 엮임 한바있다. 《홍선웅의 판각기행전》(2001,인사아트센타), 《제9회서울판화미술제》(2003,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코리아통일미술전》(93-2006,도쿄,오오사카,서울,인천,광주), 《엄뫼.모악전》(2004,전북도립미술관), 《붉은 꽃이피다-동북아 3국 목판화전》(2005,일민미술관), 《부산국제판화제》(2006,부산시청 전시실)등에 출품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광주시립미술관,전북도립미술관,일민미술관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문광부)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