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예총’ 과거에서 찾아야 할 단 한 가지의 문제점
배 인석
글쓰고, 일하고, 놀고, 술쳐묵고, 씨부리기도 하는 화가
http://blog.naver.com/kkarak2004
부산민예총 미디어기획위원장
불만스러운 현실이나 조직에서의 대안이란?
민예총의 문제를 판단할 때 심각해야 하는지? 거칠어야 하는지? 설득해야 하는지? 아니면 대충 현실에 맞춰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내부 개혁을 대폭해야 할 시기가 있다면, 지금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번에 본인이 직접 민예총에 힘을 보태는 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선배분도 있고, 사실 40대인 나도 이제는 이런 논의는 버겁기 마찬가지다. 어떤 현상이 현재에 오기까지는 나름대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역사 속에 문제와 해답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역사를 해석하는 힘과 논리는 다시 미래를 준비하는 밑천이 된다는 것이다. 거창하게 민예총의 역사 바로 세우기라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는 힘과 살핌은 현재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원인을 해명 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다. 난 이 살핌에 있어 하나의 문제의식을 지적하고 하나의 제안을 끝으로 하려한다. 만약 민예총과 관련된 미래의 의제를 마련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이 글을 빌미로 전국의 젊은? 젊은 형식의 논의 판에 참가 할 수 있는 분들과 계속 고민 해 나가길 바래본다. 불만스러운 현실이나 조직에서의 대안이란? 문젯거리와 정면으로 승부를 한 판 벌이든지, 아니면 외곽에 새로운 대안 장치를 마련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선택하기에 앞서, 과거를 돌아보고 효험 있는 의제를 뽑아내는 것부터 흥미를 가지길 원한다. 그리고 이 흥미도 나름 희망의 가능성을 전재로 해야 할 성 싶다.
민예총 최선의 길을 걸어온 것일까?
지금의 이야기들은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민예총의 현실을 그리 벗어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도마 위에 민예총이라는 20년 넘은 생선 하나를 올려놓고 회를 친다면, 일단 요리사가 이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배포는 가지고 칼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민예총의 지도부 또는 회원들이 들어서 불편할 만한 정도는 피해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연 한국의 문화예술 판에서 민예총은 최선이었는가? 아니면 자신들도 모를 의도되지 않은 문제와 노정은 없었는지를 살펴볼 만하다. 나는 민예총에서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전망하는데 있어,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단절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었으면 한다. 현재는 현재로서 미래와 과거를 단절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지금의 모습은 아마도 머나먼 과거의 결과물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미래에 대한 업보가 숨겨져 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부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선택이란 이미 많은 선택의 폭을 가지기 어려운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민예총이 지금에 와서 미래를 위한 선택의 가지 수가 적어 졌다면 이것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 이미 과거로부터 연유하여 제약을 받거나 통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새로움을 위하여 조직에서 불합리한 과거를 만든 장본인이 아닌, 중도에 합류한 세력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라고 한들 그들 또한 쉽게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직의 역사가 길면 길수록 과거에 의하여 미래는 많은 디자인을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이 확보된 현실이 아니고서야 조직의 미래에 관한 논의는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대충 개혁이라 하더라도 많은 부분 과거의 역사가 재해석되고, 그 주역들이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어찌 미래를 위한 순항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새로운 조직이란 과거 조직의 불합리한 역사를 연찬하여 선택의 가지 수가 많은 자유로운 내용을 전제로 탄생하는 것이다.
민예총 조직이 갑갑한지? 아니면 밖이 더 갑갑한지?
다음은 민예총 조직과 연유한 회원들의 주변 사를 살펴볼 만하다. 이런 살핌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이다. 회원들은 쉽게 자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어쩌면 여기에서 민예총 운영과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곧 회원들의 사고와 인식의 수준은 민예총의 과거 흔적을 직접 대변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회원들의 인식과 지역에서, 문화예술 판에서 느끼는 한계들이 조직 운영의 한계라고 본다. 문화예술 판은 민예총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역의 구성원은 민예총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문화예술인으로 살면서 민예총 조직이 갑갑한지? 아니면 밖이 더 갑갑한지? 뭐 이런 정도의 질문이다. 나의 사고가 미래에 어디에서 실현되고 호응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지점은 과거 민예총의 태생적인 정당성에 삶의 시선을 가두자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협동이 민예총 내부보다는 외부의 진일보가 부쩍 눈에 띄는 현실을 찾자는 것이고, 시대의 변모에 따른 회원들의 생각과 상상에 대한 변화와 적응력의 현재를 묻는 것이다. 이는 세대나 나이,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다른 반응이 있을 법도 하다. 여기에 회원들의 조직 구속력과 쓰임새의 차이에 따라서도 다를 것이다. 가령 조직보다 개인의 능력이 큰 회원이거나, 실무 영향력이 있는 회원의 경우들도 분명 일반적인 회원과의 사고 차이는 있을 것이다. 최근에 기독교 당을 창당한다고 하는데 그들을 둘러싼 가십거리가 가관이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독교당 주동자의 과거부터의 발언들이다. “만약에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안 찍는 사람은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거야.” “생명책에서 안 지움을 당하려면 무조건 이명박 찍어. 알았지?” “애 다섯 안 낳으면 감방 보내겠다.” “여 신도에게 빤스 벗으라고 해서 벗으면 내 신도” 이런 얼토당토않은 유치한 말을 해대는 이분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생겼을까? 나는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강도 높은 대중과의 정서적인 괴리의 이유라고 본다. 아마 이런 발언은 우익 개신교 집단 내에서는 환영하며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도 바보가 아닐진대 이런 발언을 공공연히 해댈 까닭이 있겠는가? 아무리 자기들끼리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문제는 밖의 여론이다. 조직의 안과 밖의 여론 차이가 엄청나게 있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견제를 제대로 받아 본 일이 없는 많은 세월들이 성역에 가까운 괴물을 만들지 않았을까? 여기에 더 보태어 재밌는 상상을 해 본다. 이 신도들은 과연 일반인들과 어떻게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불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소통을 하는 걸까? 자기들끼리?
조직을 회원의 통제 안에 두려는 노력이
여론조사를 볼 때면 요즘 말로 충성도란 표현이 있다. 이 충성도는 지도하는 그룹이나, 조직을 운영하는 힘으로서 대외적인 자기 결정권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밑받침이다. 하지만 이 충성도는 어떤 사안과 조직의 존재 가치에 대한 충성도 인가를 구분해 주어야 하는 데 막무가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내부의 문제를 일상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면 성역을 쌓는 것이나 진배없다. 또는 말을 해본들 그 가치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고 반영해내는 집단 이성과 시스템이 없다면 이 또한 성역 아닌 성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예전에 고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중소기업청의 주선으로 재래시장 상인들과 대화하는 자리였는데, 여기서 노무현은 시스템의 중요성과 시스템을 운영하는 투명성과 민주성의 실현에 대하여 역설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전의 문제의식은 이러하다.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나가 한 표씩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가진 자들의 한 표가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들의 한 표와 같이, 없는 자들의 한 표도 한 표로서 실현될 수 있으려면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작은 지자체에서부터 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이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은 곧 투명성과 민주성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직이라는 시스템은 투명성과 민주성을 갖추면서 개개인들이 통제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당신이 속해있는 지자체 시스템을 잘 통제하라는 당부를 하듯이, 민예총의 회원들도 당신의 조직이 잘 통제되고 있는지, 있었는지, 있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상대 진영에 대한 대응이니, 예술의, 예술가의 특수성이니 하면서 이 일반적인 조직 원리를 실현하는 걸 미룬다면, 또는 이때까지 그러하고도 심각성을 못 느꼈다면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다시 반복을 하면 본부, 지회. 지부장이나, 단위 이사들이 이런 시스템의 실현을 하지 않거나, 시간의 문제, 회원 자발성의 부족 문제로 치부하여 미루어 왔거나, 할 생각도, 여력도 없었다면 지금이야 말로 그 많은 20년이란 세월을 소진하고 진이 빠진 건 이 때문이지 않겠는가? 조직은 회원의 미래에 앞서 조직의 미래를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면 회원을 위하는 자체가 조직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조직을 회원의 통제 안에 두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정보의 투명성과 회원에 대한 민주적인 훈련을 조직은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다 민예총이란 조직에서 많은 시간 동안 벌어진 미성숙한 예술 행정 시스템과 지도자들의 책임이고, 이런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거나 저항하지 않은 회원들의 나태함이다.
조직은 회원들로 부터 칭찬받기 위해 노력하는 곳
젊은 사람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고들 한다. 조직에 새로운 회원이 없으면 그 조직도 미래가 없다. 요즘은 지자체에서도 젊은 사람들을 붙잡거나, 외부의 젊은 사람들을 유입하려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소외된 문화 지역이라 선포하여 지원을 하다가 언젠가 부터는 도시 재생을 고민하고 이제는 통으로 묶어 창조도시 어쩌고 하는 판국이다. 중앙을 통하지 않은 지역과 지역 간의 교류도 장려하는 분위기로 넘어가고 있다. 비단 젊은 사람뿐 아니라 도시의 미래는 어리지만 부족한 이들에 대한 투자, 소통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민예총은 회원들로부터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방안과 발상을 확보하려는 내부 투자와 준비를 갖추었는지 운영에 대한 의도성을 자문해 보아야 한다. 상스럽고 껄끄럽겠지만, 민예총의 누적된 문제는 대략 이런 것이다. 조직이 사회생활이라고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 내의 사회성을 정착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연중 가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결론에 이르는 과정의 중요성은 알지만 현실적인 적용에 항상 밀리는 것이다. 집단적인 판단과 액션이 항상 우선이고 개인적인 의견을 들어주지 못하는 조급증이 있는 것이다. 회원들에게 미래의 가능한 자유를 알려주거나 만들어 주려고 하기보다는 조직에서 안 되는 것부터 은연중 인식시켜는 것이다. 스스로 새로운? 권위에 물들어 있는데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원들에게 새로운 정보나 아이디어 등 이상한? 제안을 듣거나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함에도, 회원들을 은연중 지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조직은 회원을 칭찬하는 곳이 아니라, 칭찬받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다. 회원의 능력을 바로 쓰려고만 하지 말고 미래에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노력을 아낀 것이다. 조직의 직책을 권위와 서열로 생각하고 일하면서 크는 기회를 배제하는 잠재적인 습관을 가진 것이다. 사회 모순에 대항하는 구닥다리 형식에 너무 반복적으로 익숙한 것이다. 이 중에 하나라도 걸린 문제를 사소하게 보거나 나는, 민예총은 그럴 리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대의제를 과감하게 줄이고 가능한 회원들이 직접운영을
다음 제안은 정말 일반적이다. 그러니 달리 토를 안 붙여도 좋을 당연한 지적이라 여긴다. 당장 할 수는 없지 라고 한다면 어쩔 수는 없으나, 작은 문제부터 차근차근 제압하지 않고 매번 변명만 했다면, 그 세월이 간단치 않은 20년인 것이다. 그렇다면 민예총은 내부의 정치와 지도력에 한계를 드러냈거나, 행정 마인드 즉 마음씨를 담는 행정의 패배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몰랐어도 나쁜 행정은 나쁜 마음씨를 담고 있으니 말이다. 조직의 민주도 투명한 행정도 실현 못 했던 무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민예총에 제안해야 할 핵심은 회원 개별의 자유를 어떻게 시스템화 시켜낼 수 있는지 중지를 모으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핵심은 회원의 권리를 중심으로 모시는 철학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직의 원리이고 문제는 그 의지이다. 소통이 결론이라면 소통의 의지는 과정이다. 소통의 의지와 실천이 있어야 소통이 실현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민예총에서 회원들에 대한 개별적인 자유와 그 자유로부터 응집의 기초가 되는 본부, 지회, 지부, 소속 위원회, 소모임, 개인, 대중의 언로를 차단하지 않는 수평적이고 쌍방향의 구조를 심각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그리고 의결의 구조는 현재의 대의제를 과감하게 줄이거나 일부 없애고 가능한 회원들이 직접운영의 시스템을 보장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회원들의 의견 수렴은 단계적인 계단을 거치지 않고 조직의 어느 분야나 직접 발언, 발의하게 하는 것이다. 전국에 펼쳐진 조직 또한 지역과 지역 간의 간섭과 자유로운 의견 개진도 가능해야 할 것이다. 지역자치가 지역 분할통치의 이데올로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세혈관이 살아나야 하기에 모든 정보의 공유는 필수적이다. 이런 제안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과 장치는 더 연구해야 할 성싶다. 그러나 대충 의견을 낸다면 웹 사이트에 정보창고를 만들어 누구나 올리고 누구나 열람하는 방안, 모바일을 이용한 상시적인 의사 결정과 투표를 할 수도 있다. 조직의 의제는 소수의 독점을 벗어나 누구나 발의하고 일정 수준의 동조, 찬성자가 생기면 바로 조직의 의제로 채택하는 안건 채택방식도 가능할 것이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조직에서 생각과 지혜를 끌어 올리는 범위와 기초가 회원들이라는 것이고 민주를 지향하고 싶다면 이런 노력과 시스템은 조직의 의무라는 인식을 하여야 한다. 회에서 지도자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결국은 회원들의 대리자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총회는 엄중하고 원만해야 비로소 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민예총 과거를 뒤져 아주 방심했던 단 한 가지를 앞으로 민예총이 개혁을 하던, 재편을 하던, 장기에서 바둑으로 판 갈이를 하던지 이를 철저히 인식하고 현실화시키는 노력이 관건일 것이다. ■
[땜빵 비평] 본 글은 인천민예총의 비평지 인천문화비평 2011년 가을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http://talk.openart.or.kr/gnu/bbs/board.php?bo_table=tcolumn&wr_id=108
부산민예총 금요칼럼 "글빨" 의견쓰기
'민미협 아카이빙 > 2010년~2019년대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은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이다 (0) | 2020.12.07 |
---|---|
부산비엔날레 '2011년도 학술심포지움' 개최 안내 (0) | 2020.12.07 |
[글빨19] 4호선 동래역의 벽화는 누구의 작품인가? (0) | 2020.12.07 |
공존하는 풍경2 (0) | 2020.12.07 |
2011 풀 프로덕션 출판기념전 《김용익 : 무통문명無痛文明에 소심하게 저항하기》 (0) | 2020.12.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