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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지회지부 소식/목포민미협

목포민미협 정기 기획전 '남도산하展'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2. 4.

목포민미협 정기 기획전
제4회 남도산하展  - 우리는 남도 산하에서 신화를 찾는다 -

전시: 2010년 12월 1일 ~ 7일이후 (연장전시 될 수 있습니다)
장소: 목포 종합예술갤러리(여객터미널 4층)

전시개막 및 심포지엄: 12월 2일 오후 4시

심포지엄 내용
원동석 - 왜 신화이며 생태예술은 무엇인가  (원동석)
홍성담 - 서사무가 (敍事巫歌) 바리데기와 생태의 인연  (그림[ 바리데기연작]과[新夢遊桃源圖]를 중심으로)


우리는 남도 산하에서 신화를 찾는다

‘외형이 닮은 것으로 그림을 논하는 것은  식견이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다’ 라고 한 것은 송 대 시인 소동파(1036-1101)가 한 말이다 중국의 송 대는 중국화의 황금시대로 소동파는 시인이자 당대 최고의 감식가, 비평가인데 그의 말뜻은 화가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경 (사실)주의를 넘어서서 자연의 진실, 진형(眞形)을 찾으라는 권고이다 이를 함축한 용어가 ‘ 이형전신 (以形傳神)’  이며 혹은  ‘기운생동 ’ 등으로 일찍이 동양화가들의 화두가 되어왔다는 것은 미술사의 상식이다.
이형전신이라는 말은 자연의 형상을 그리되 자연의 신을 찾아 그린다, 옮긴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자연에게 신이 있는가? 소동파는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면, 반대로 인간에게만 정신이 있고 자연은 한낱 소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서양화의 미학이다. 오늘의 도시 화가들이 그리는 산수, 풍경화는 서양미학의 범주에 머물려 있다.
작가들에게 익숙한 원근법적 표현방식은 인간중심적 시각의 반영으로서 서양적 근대 교육의 결과물이다. 자연중심의 원근법은 역원근법을 비롯한 부감시법등 복합적 원근, 겹눈을 가지고 있는 이동적 원근법이다.
자연의 만물은 모두 죽는다, 그러나  결코 죽지 아니한 신, 혼, 영혼이 있다. 그것이 애니미즘이라는 원시신앙의 명제인데, 동서양의 고대종교, 사상으로 넘어가면, 말씀, 하나님,  이데아, 도, 브라만, 반야, 깨달음의 지혜로 바뀐다.  

‘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신약 요한복음에서 하는 말이나 노자가 도덕경에서  ‘ 도가 있었다. 천지가 시작되고 만물의 이름, 말을 갖추게 되었다 는 것과 같은 뜻이다. 로고스를 理性이라고 번역하는데 인간의 ‘말’ 이 아닌  하나님의 말이며, 곧 신화라는 의미이다 그리스어의 미토스 [Mithos]도 이 같은  의미이다. 즉 자연의 말이 신화이며 그것은 ‘ 들려오는 말’ 이며 반복 재생하는 불변의 말이다. 결코 유한한 인간의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자연 만물에는 소리와 색깔, 형상이 저마다 갖추고 있는데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의 말씀이 있다는 것. 인간이 살아가는 활동은 이 같은 신화를 찾는 것이며 그 활동의 표현물이 바로 예술이다 는 사실이다 예술의 발생과 신화의 시원은  결국 같다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의 명제가 아니다. 과학적 사실은 지식의 나열이다.
하나님의 소리, 자연에서 들려오는 말씀 찾기는  종교적으로 깊은 체험이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거나, 혹은 직관하며 상상하는 길인데, 신화에 대한 상상력, 말씀의 신을 담보하는  것이므로 예술이 존재하는 인식 근거이기도 하다
원시적부터 자연의 말을 듣고 전하는 사람을 주술사, 무당이라고 했는데 중국어 聲人이란 뜻은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자란 의미이다. 공자를  聖人이라는 이유는 50세에 하늘의 소리 알았고 60에 들려오는 소리에 밝아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늘에 거스림이 없었다는 그의 삶이 이를 요약하고 있으며 무위자연의 경지를 소요하였던 노자, 장자, 자연의 무소유와 무한을 넘나든 부처의 삶이 이를 잘 대변한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하나님 말씀대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인간 구원의 길을 예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만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 그려진 들소를 살생하는 주술 행위를 놓고서 예술사가들은 더 많은 사냥능력을 기원하는 주술적 힘의 강화라는 해석에 대하여 조셉 켐벨 같은 신화학자는 들소의 신에게 인간의 먹잇감이 되도록 살생의 허용을 간구하며, 그 같은 허용의 보답에 대한 감사함을 제사 드리고 있는 들소의 신전이라는 것이다. 신석기 토기 문양에 새겨진 바람, 비, 물, 번개, 곡식 등은 농경시대의 신들에게 제사 드리기 위한 표상물이다.
원시인들은 자신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살려주는 자연만물을 신이라 생각하고 그 고마움을 보답하는 주술행위,  굿, 제사의 표상이  노래이며 춤이며 그림이었던 것이다. 원래 한자의 神 이라는 낱말도 중국 갑골문의 번개를 의미하는 申에서 유래한다. 번개가 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반갑다, 비나이다. 고맙다 등은 자연신에 대한 우리말 감정표현이다.
명창이 최고 경지를 득음이라 하는데 자연에서 소리를 얻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예술가는 자연과의 감응에서 신바람을 얻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무당과 다름바 없다. 결코 서양미학이 알지 못하는 우리예술의 요체가 여기에 있다.

남도의 자연이 남도인의 삶을 살리었고 예술을 키워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서양문명이 도시 공간을 만들고 자본주의 개발논리가 농촌 경제를 파괴하고
자연을 자본의 소유, 탐욕의 대상물로 전락시키면서 예술인들마저 자연의 고마움을 잃어버리었다. 도시인의 관광 개념, 위락의 공간으로 변질되면서,  자연 안에 내재한 신들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동시에 인간의 영혼이 고갈됨을 의미하는데 더욱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면서 미디어 매체가 흥행하면서 사이비가 판을 치는, 자본주의 상품논리에 빠져있는  세상을 나는 이를 우리예술의 위기, 실종 상태라고 진단한다.
현대예술의 전환기를 세운 것은 민중예술운동이며 이를 주도한 것은 남도예술인의 인맥이었다. 그렇다면 희망은 남아있다.
도시예술의 한계를 넘어, 민중예술의 다음단계로 우리예술의 독자성을 표방할 수있는 근거를 남도자연의 재발견, 신화 찾기라고 본다. 그 길은 여러 갈래이며 그 길을 찾는 상상력은 작가들의 몫이다  여러 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물은 다시 바다로 나가듯이-

                                        원동석 -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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