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를 위해 준비해 둔 비옥한 흙이 올해는 그대로 쌓여 있다. 그 뒤로 흙무더기를 한움큼 쥔 농민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대추리 벽에 그려진 이종구의 작품이다. 미군부대 확장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대추리 현장 곳곳에 자리잡은 작가의 작품에는 평범한 농민의 모습과 함께 ‘내 땅에서 농사짓고 싶다’는 문구가 선언처럼 새겨져 있다. 땅을 잃어버린 농민의 모순된 현실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일률적인 산업화와 도시화, 세계화로 인해 해체된 농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 이종구의 시선이 이번에는 대추리로 옮겨졌다. 작가는 “대추리 주민들은 그저 ‘내 땅’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할 뿐이다. 나는 주민들의 꿈이 깨져버린 현실에 대한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작가가 대추리 곳곳에서 만난 대추리 주민으로 실제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본 주민들은 작품과는 반대로 현실보다 더 비현실적인 현재의 상황을 곱씹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 자신들의 모습에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주민을 찾아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손과 호미를 든 손을 부각시켜 그림을 완성”시키려던 작가의 계획은 당시 여건 상의 문제로 무산됐지만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의 손에는 여전히 투쟁을 위한 총이나 칼이 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가 심겨진 모판이나 호미가 들려져 있다. 대추리 주민들의 소박한 꿈을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호도한 언론에 대한 조소도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이종구 작가는 “앞으로 대추리가 대대적으로 철거되는 날 작품도 폐기물과 함께 땅에 묻힐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작가들과 연대해 문화적 폭력에 대해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더불어 “단 며칠동안의 생명을 안고 태어난 작품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로 인한 분노 에 앞서 작가로서 주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말해줄 수 있어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대추리에 있는 이종구의 작품은 총 5점이다. “그동안 현장작가들의 많은 참여로 인해 남아 있는 벽이 많지 않아 당초 계획했던 20점 정도의 그림을 그리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의 현실참여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종구의 작가노트]
미술도 세상을, 사람을, 삶을 위해 존재한다
" 금요일 아침에 미술대회가 있는 날이라 학교에 잠깐 들렸다가 다시 대추리로 갔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간 서양화과 아이들 몇명을 데리고 벽화작업을 시작했는데이틀간의 작업으로 완성할 수가 없었다. 첫날은 그나마 아이들이 네명이라서 작업량이 원만했는데 둘째날은 두명 만 데려가는 바람에 다섯명을 그리는 그림을 마무리하기에 벅찼던 것이다. 더구나 수요일은 나도 다른 일정이 있었지만 장마가 온다고 해서 날을 잡지도 못한채 작업을 중단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다음날은 비가왔다.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금요일 새벽 미술대회라 잠깐 얼굴도 비칠겸 학교에 내려갔다가 아무래도 마무리 하지 못한 대추리 벽화가 마음에 걸려 김밥하나 싸들고 아침 일찍 대추리로 간 것이다. (…) " [작가노트 전문보기]
'민미협 아카이빙 > 2000년~2009년대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새울솟대> 최병수_2006_대추리에서 (0) | 2020.11.20 |
---|---|
<제국없는 흙> 최병수_2006_대추리에서 (0) | 2020.11.20 |
《조국의 산하전》은 7월 16일까지 대추리 농협창고에서 열린다. (0) | 2020.11.20 |
[광주비엔날레소식] 모니카 본비치니_건설 이주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묻는다 (0) | 2020.11.20 |
문예회관이 "문화시대"를 대변하는가 ...서울아트가이드 7월호 (0) | 2020.1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