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을지로순환선
그림 한 장에 수많은 민중 이야기
정문교 기자 moon1917@jinbo.net / 2009년02월10일 18시03분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2008, 거북이북스)
답답한 어둠의 터널이 대부분인 서울의 지하철. 그 안에 있다 보면 지하에 갇힌 건 아닌가하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지하철 이용객에게 서울도심을 관통하는 2호선은 지상으로 달리는 구간이 비교적 많은 점이 작은 위안이 된다. 그만큼 2호선의 바깥풍경은 희소가치가 있다. 창밖을 보는 순간 ‘창밖에 있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그런 궁금증이 한 장의 그림에 담겨있다.
한장의 그림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이다. 한 장의 그림에는 을지로 순환선에 탄 사람들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아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선교하는 중년 남자, 책 읽는 학생, 자는 아저씨...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지만 표정은 다들 피곤에 찌든 모습이다.
지하철 바깥세상엔 달동네가 보인다. 아이업고 빨래 너는 엄마, 좁은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 전봇대에서 일하는 노동자, 지게꾼, 빨간 띠를 두르고 사장실에 앉은 노동자와 고함지르는 사장... 많은 사람들이 얽혀 살아가고 있다.
지하철 안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같은 시간에 있을 법한 일들이 ‘을지로 순환선’에 모두 그려져 있다. 대충 지나치면서 보면 몇 초 안 걸려서 볼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한 때 유행했던 ‘월리를 찾아라’처럼 작은 이야기를 하나씩 찾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그렇다고 최호철의 그림과 ‘월리를 찾아라’가 비슷한 종류는 아니다. 가장 큰 차이는 ‘월리를 찾아라’가 느끼한 웃음의 천편일률적인 행복한 모습의 그림이라면 최호철의 그림은 살 냄새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많은 이야기는 챙겨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만화도 회화도 아닌 그림
최호철의 그림이 담긴 ‘을지로순환선’은 지난해 2월 나왔다. ‘을지로 순화선’처럼 눈을 팽팽 돌려야 안에 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그림만 있는 건 아니다. 빼곡한 집들을 보면서 웅크리고 앉아 담배 피는 늙은 남자의 모습이 나오는 ‘집’처럼 한 이야기를 담았지만 울림이 큰 그림들도 있다.
최호철은 화가이기도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만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회화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다가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 만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 생활 초기엔 민중미술을 그렸다. ‘을지로 순환선’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지금은 어린이잡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전태일 열사가 주인공인 ‘태일이’를 연재한다. 다양한 경력만 봐도 그의 작품을 회화 혹은 만화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림이다.
‘을지로순환선’은 모두 5장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 사는 풍경’에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삶의 풍경이, ‘일하는 사람들’엔 다양한 직업의 사람 이야기가, ‘큰 세상, 작은 목소리’엔 대추리, 고 김선일 씨의 고향 등 사건의 현장을, ‘우리집 이야기’는 소소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지만 공통점은 있다. 투박하지만 세상의 근간인 민중의 모습이 따뜻하게 담겨 있다.
활자가 빽빽한 책만 보는 이, 책을 안 읽는 이, 만화책만 좋아하는 이, 모두 편히 볼 책이다. 최호철은 그림 하나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걸 그림으로 보여준다.
혹시 최호철의 그림책을 펼치는 당신이 평택 대추리에 한 번이라도 갔다면 조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안정리, 기지 정문 마을’, ‘대추리, 기지 뒤쪽 마을’ 두 장의 그림 앞에 눈물을 글썽일 수도 있다.
아래 그림은 만화가들이 인터넷에 릴레이 연재중인 'MB악법 바로보기'에 최호철 화백이 참여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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