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는 없다!
용산참사 게릴라 기획전 제1부 ; “망루전亡淚戰”
[김종길 _ 미술평론가]
▲ 예술행동주의는 제도와 권력, 악의적 법이 실행하는 파괴적 문명화를 안티테제로 내재화하여 그 거름의 자양분으로 키운 실천의 나무이며, 꽃이다. 배인석 작가의 출품작.
아수라의 ‘까쇠’들이여,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그대는 1991년 5월의 굿판을 기억하는가? 그해 김지하는 조선일보 확성기로 “젊은 벗들이여,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목청을 찢었다. 결기와 비장의 음율로 타전하는 그의 소리는 민주주의의 제단에 나부끼는 독재의 깃발보다 더 절망적으로 우리의 몸을 휘 감았다. 시대는 위선과 반역, 탐욕, 독선, 기만, 환멸의 정치로 치달아 갔고, 세계는 그것들이 살포한 위장 정의의 이름으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 삶을 회복하거나 제 이름의 윤리학을 확보하는 것은 그 자체로 투쟁일 수밖에 없었으며, 미세하게 떨리는 주체의 자율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논리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1987년 6월은 1991년 5월의 권력자들에게 단지 지나간 과거의 역사일 뿐 어떠한 양심적 정치의식을 견인해 주지 않았다. 그해, 청년들은 광막한 시대의 벼랑으로 달려가 예수가 광야에서 던진 씨알의 소리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소리쳤다. 그리고 몸을 불살랐다. 참된 정의와 민주주의에 중독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불의 시학을 그들은 온몸으로 새겨 넣었다. 그러나 불의 제단은 쉬 꺼지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참된 것들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듯 자꾸만 번져 갔다. 강경대가, 김귀정이, 박승희가 죽었다. 한홍구의 표현대로 정말 하룻밤 자고 나면 새로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죽음의 의미는 죽임을 즐기는 자들에 의해 왜곡 과장되고 확대되었으며, 당시 조선일보는 최전선에서 이 죽음을 죽임의 논리로 바꾸어 선전했다.
김지하는 바로 그 확성기에 대고 소리친 꼴이 된 것이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그의 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워서 일순간에 불의 제단을 침묵으로 바꿔 버렸다. 침묵하는 자에게 민주주의는 결코 오지 않는 봄과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오직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꽃을 피위기 위해 불살랐던 그 모든 것들의 ‘잘못’으로 인해 1990년대는 1980년의 봄보다 더 짧은 시련과 더 긴 공허를 견뎌야 했다. 김지하의 외침은 그래서 폐부로 가 닿는 절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로부터 20여년이 되는 동안 하나의 사실을 간과했거나 부정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죽음의 찬미를 선동한 ‘까쇠Casseur’들의 정체는 청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하여, 우리는 김지하의 ‘젊은 벗들이여’를 ‘탐욕의 까쇠들이여’로 바꿔 읽어야 한다.
김지하는 촛불의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한 일부 세력을 가리켜 프랑스어 ‘까쇠’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복면을 쓰고 끼어들어 이렇게 저렇게 난장판을 만드는 자를 말하는 것”이며, “나는 이것을 약간 비틀어 ‘까부수고’(파괴), ‘까불고’(난동), ‘까발리는’(선동) 것을 본업으로 하는 쇠(마당쇠의 그 쇠)를 요약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 다음 그는 낮은 목소리로 현장에서 들었던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한 숨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외친다. ‘아무개를 찢어 죽이자!’ 곁에서 한 여성이 외친다. ‘너나 죽여라!’ 내 곁에 있는 초등학생이 속삭이듯 외친다. ‘종이냐, 찢게?’” 이 이야기는 촛불의 내부에도 여전히 죽음의 굿판을 선동하는 자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것인데, 과거와 달리 현재는 바로 그 현장에서 까쇠들의 선동을 부정하는 여성과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성과 아이들이 촛불의 주체였고 희망이었으며, 기억의 상실 저편에서 스스로 깨어 걸어 나온 민주주의의 실체임을 깨닫는다. 한데, MB정권은 그 많은 시대의 청년들이 쌓아 올린 민주주의를 한 순간에 쓸어버리고, 촛불의 저 도도한 민중의지마저도 법적 테두리로 끌어 모아 ‘싸잡아’ 범죄화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산참사에서 보여주듯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민중의 몸을 불사른다. 시대의 역행이 아니라 시대의 추락이며, 현실적 아수라에 다름 아니다.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은 이 시대에 충분히 예지적이다. 강경대의 절망이 그를 그토록 분노케 하였지만, 생명을 찬탈하려는 그 모든 까쇠들을 향해 우리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소리쳐야만 할 것이다.
생태적 에스노그라피를 실천하라!
아수라의 힘은 다시 온 대지로 향하고 있다. 용산참사로 확연히 드러났듯이 민중을 향한 화염의 비수와 더불어 우리를 경악케 하는 세종로 1번지 까쇠들의 도시 재개발과 대운하 정책은 전국토의 전면적 개토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것은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이래 가장 잔인하게 전개될 대지에 대한 학살일 터이다. 세계의 환경론자들은 문명의 쾌속 질주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돌출시켰으나 오히려 그러한 이성적 판단이 지속적인 개발정책의 자기이념으로 합리화 되었다는 게 근본 생태론자들의 주장이다. 자연에 대한 생태론적 사유에는 이성과 합리적 사유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생명성이 존재한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본뜻은 주체와 객체가 한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떠한 인위적 가해 없이 그 스스로 존립되었고 형상화되었으며, 또한 그 기세와 흐름으로 앞으로도 영구할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박정희가 독일 아우토반의 무한 질주 개념을 흉내 내어 경부고속도로를 직선의 폭력으로 뚫어 버렸듯이 MB정부는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카르텔을 하나의 아비투스habitus로 형성시켜 토목국가를 위한 대중설교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박정희의 폭력을 내면화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MB정부의 그런 개념 활용을 알면 뒤로 넘어가겠지만, MB정부가 상상하는 에코토피아 대한민국에는 그래서 생태적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이 지닌 최소한의 공공성이나 역사적 기억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이 대운하를 운운하며 “고구려, 신라, 백제, 마한이 융성했던 이 강의 생명력으로 국운을 일으키자”고 떠벌리는 것은 모순의 구토이다. 대운하를 위한 비밀조직을 운영하면서 양심선언 연구자를 징계하는 이들의 태도에는 사회적 합의나 미래세대에 대한 역사적 책임보다 한 권력자의 탐욕만을 충족시키려는 복종의 패거리 의식만 엿보인다.
이 땅은 그들이 언급했듯이 유사이래 한민족의 역사가 골골에 새겨진 거대한 생명이다. 이 땅 어디에도 그 숨결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 민족의 예술 미학은 그 근본부터 자연 미학의 본류를 흠모했고, 숱한 예술가들이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 예술적 고투를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가들 또한 사기史記의 첫 페이지를 자연과 인간이 혼융된 신화적 판타지로 기록했던 것은 그 뿌리가 대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인간의 삶은 둘로 분리될 수 없으며,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거나 해서도 안 된다. 이 구도가 조금씩 붕괴된 것은 인간이 자연의 신성을 밀어내면서 획득한 근대에 있다. 인간의 발과 수레로 새겼던 실크로드는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의해 ‘국도’로 확장 개발되었고, 그 길은 침략과 약탈, 전쟁의 아우성을 실어 날랐다. 근대화 도시화 현대화에서 ‘도로’는 문명이라는 괴물을 성장시켜 온 최대의 공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괴물의 속도로 그들은 생명에 반하는 만행을 저지를 태세다. 유구무언. 그들은 역사 앞에 생명이니 숨결이니 환경이니 하는 따위의 미사여구를 내뱉을 자격이 없다. 이 땅은 반역자들의 영토가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정권을 잡은 권력자들이 하는 일이란 온갖 난개발을 통한 파괴의 정치뿐이다. 자본주의 도시문명의 확장을 위대한 선진화의 척도로 내세우면서 ‘생태도시’ ‘휴먼시아’ ‘명품도시’를 부르짖고, 녹색성장과 녹색뉴딜이 정권의 미래비전이라면서 토건국가의 유토피아를 설교해 온 것은 참여정부든 실용정부든 똑 같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새만금 간척사업, 서귀포 해군기지, 천성산 터널, 시화호, 행정복합도시에서 경인운하까지 지난 정부에서 현 정부까지 죽임의 정책과 집행은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
예술행동주의는 제도와 권력, 악의적 법이 실행하는 파괴적 문명화를 안티테제로 내재화하여 그 거름의 자양분으로 키운 실천의 나무이며, 꽃이다. 우리는 이 예술의 이름으로 파괴의 문명을 생명의 문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고, 미래세대를 위한 예지적 전망을 타전할 수 있다. 하여, 예술행동주의가 발산하는 미적 이미지와 에너지는 고정되거나 관념화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개념 전야의 혼돈을 보여주는 역동과 ‘엇’의 미학이며, 분열과 통합이 어그러진 ‘개체-융합’의 마당 굿이다. 용산참사 게릴라 기획전으로 치러질 <망루전亡淚戰>(제1부)과 <망루전望樓傳>(제2부)는 그 굿판의 서막이라 할 것이다!
편집 : [안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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