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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한국경제, [시가 있는 갤러리] 정끝별 `불멸의 표절`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30.

[시가 있는 갤러리]

정끝별 `불멸의 표절`


김준권 '보리밭에서'(10일~4월6일,서울 성북구 길음동 현대백화점 미아점 갤러리H)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대는 저 장다리꽃을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싱싱한

아침냄새를 표절할래(…)

닝닝 허공에 정지한 벌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했던 당신의 새벽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지구라는 슬픈

매듭을 베껴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정끝별 '불멸의 표절'부분

작가에게 표절은 치명적 약점이다. 창작을 표방하는 작가의 존재 의미를 전면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선 드러내놓고 표절하겠다고 주장한다.

바람과 뿔새를 표절하고 싱싱한 아침냄새와 앙다문 씨앗의 침묵,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표절하고 마침내 벌의 생을 떠받치고 선 꽃 한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까지 표절한다니.

그것은 세상의 이치를 영원히 해득할 수 없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인간에게 삶의 비밀은 끝내 풀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셈이다.

그래서 지구라는 슬픈 매듭을 베껴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되겠다고 했다. 이런 한계를 알고,늘 부족과 미완성에 시달리며 살아갈 준비를 해야하는 것일까.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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