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4.8
총선에 문화예술공약 왜 없나
70년대 ‘경제개발’ 구호가 풍미할 때, 80년대 ‘선진국 건설’ 구호가 난무할 때, ‘문화’는 사치스러운 오락물이나 한가한 음풍농월이나 정부 선전 도구 쯤으로 폄하되거나 보호·육성·지원 대상으로서 시혜적으로 언급되곤 했다.
그러다가 90년대 문민정부 시대부터 ‘세계화’ 구호와 함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문화에 대한 정치·사회적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 시대에는 ‘문화의 세기’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문화 벤처’ ‘신지식인’과 같은 단어들과 함께 문화에 대한 경제적 관심이 고조됐다.
문화 예산이 정부 예산의 1%인 1조원을 넘었다는 자랑거리나, ‘쥬라기공원’이라는 영화 한 편이 현대자동차의 1년 총판매 수입을 앞질렀다는 신화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문화산업론으로 확대되어, 현재 참여정부의 문화정책에 음으로 양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를 먼저 먹으려는 조급증이 만들어 낸 결과는 기초예술의 소외와 붕괴로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기초예술살리기 문화예술인 연대’(임시 이름)가 출범했다. 1000만이 넘는 관객이 영화관으로 몰려들고, 영상 방송 산업의 규모가 5조원을 넘어서고, 초대형 오페라와 뮤지컬들이 관객몰이에 성공하며 연달아 막을 올리고 있는 이 ‘문화의 시대’에 예총, 민예총 소속을 불문하고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서 기초예술의 참담한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출판 시장의 불황 속에서 끼니를 걱정하는 작가들, 임대료를 올린다는 건물주의 말 한 마디에 길거리에서 항의의 몸부림을 치는 연극인들, 상영관을 잡지 못해 땀 흘려 만든 작품을 창고에서 썩혀야 하는 독립영화인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자들, 세계문화유산 지정에도 불구하고 단칸 셋방에서 목이 터져라 수련을 하는 소리꾼들이 기아의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예술인들의 외침은 무척 절박하다.
그러나 “예술이 위축되면 문화생태계는 파괴되고 문화적 자원도 고갈”되며, “예술의 성장 없이는 인문학의 발전도, 문화산업의 성장도, 지식정보산업은 물론 일반 제품업계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그들의 절규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지난 번 대선 때도 그러했지만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문화 예술과 관련된 정책을 얘기하는 의원이나 정당도 없고, 물어 보는 국민도 없고, 토론장의 패널도 없다. 정치 개혁, 경제 성장, 고용, 복지, 교육, 국방, 외교, 여성 등의 정책 홍수 속에서조차 문화 예술은 사라지고 없다. 스크린 쿼터 문제나 새 문화예술진흥법안 등의 시급한 현안은 여전히 정치나 경제의 뒷전에서 무성의하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단식광대’는 단식을 생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광대에 관한 이야기다. 예전에는 그가 단식을 하고 하루하루 날짜가 늘어갈 때마다 찬미의 인파가 몰려들고, 온 도시가 그에 관한 얘기로 떠들썩했다. 물론 그를 고용한 흥행주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차츰 즐길거리가 늘어나자 아무도 그의 단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됐다. 그러나 오로지 단식밖에 할 줄 모르는 단식광대는 서커스 동물 우리 안에서 혼자 단식을 하다가 굶어 죽고, 그 자리에는 표범이 관중들의 환호 속에 얼룩무늬를 뽐내며 걸어 다니게 된다.
반세기 전에 씌어진 이 소설은 놀랍게도 화려한 대중문화와 영상산업의 포효 속에서 쓸쓸히 죽어 가는 기초예술의 현재를 예견한 듯하다. 기초예술의 붕괴는 창조력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 위기가 심각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문화산업의 장래도 불안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방송과 영화, 애니메이션 작품의 상당 부분은 원작 소설과 희곡과 연극·무용·전통예술에 몸담은 기초예술가들의 창작물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단식광대는 사라졌지만 단식이 의미하는 문화적 상징성마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자는 웰빙족이 넘쳐나는 이 사회 속에서 물질적 욕망을 초월하는 정신적 가치의 상징으로서 단식하는 예술가들의 자리는 반드시 어디엔가 마련돼야 한다. ‘기초예술살리기’ 운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김명곤 / 국립극장 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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