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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오마이뉴스, "봉하마을에 추모벽화 그릴 거예요"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2. 3.

"봉하마을에 추모벽화 그릴 거예요"


무료 마을벽화 그려주는 '아름다운 청년들'의 '순박한' 계획

이주빈 (clubnip)


▲ 한 시골버스 정류장을 노란색 두건을 쓴 청년들이 둘러보고 있다.  
ⓒ 이주빈

그림 잘 그리는 사람에 대한 동경... "잘 그린 그림이란..."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부러웠다. 둔한 색감은 봄의 색깔을 우려내는 것도 힘들었고, 서툰 붓질은 둥근 원 하나를 따라가지 못했다. 연습을 열심히 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숙제로 내준 수채화 한 장을 그리기 위해 꼬박 일주일, 날을 새다시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에 대한 동경은 더 커져만 갈 뿐이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도화지에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그리는 그림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임을.



도화지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만 사람 마음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이를 만나기는 힘들다. 그가 화단의 원로화백이든 풋내 나는 수련생이든 말이다. 하도 여기저기서 고수(高手)인양 제절로 티내는 이들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일 광주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에서 만난 청년들은 흔한 말로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았다. 어쩌면 또 그것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청소부처럼 작은 콘크리트 건조물의 쌓인 먼지를 쓸어내고 그득한 거미줄을 걷어냈다. 다음엔 측량 기사처럼 하얀 종이를 펼치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다. 그러고는 페인트공처럼 콘크리트 벽면에 살구색이며 하늘색 칠을 했다. 이윽고 설계사처럼 그 위에 연필로 슥삭슥삭 뭔가를 그려 넣었다. 그러더니 청년들은 지나가는 아이들까지 합세시켜 연필이 지나간 선 안으로 면을 만들어내고, 그림을 채워갔다.



한 시골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물감과 붓을 든 청년들


▲ 청년들은 청소를 하는가 싶더니 화사한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 이주빈


▲ 점심이 지나자 허름했던 마을버스 정류장이 화사해지기 시작했다.  
ⓒ 이주빈  

이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들은 '좋은세상 만들기(대표 정수)' 소속 회원이라고 했다. 열린 미술을 지향하며 지난 2002년에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는 무료로 시골버스 정류장과 시골학교 담 등에 벽화를 그려왔다. 이들이 그동안 무료로 그려온 벽화만 100여 작품에 이른다.



이날도 이들은 광주라고는 하지만 자연마을에 가까운 농막마을 버스정류장에 무료벽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뙤약볕에 붉게 익어가는 그들의 볼이 더욱 아름다웠던 것은 모두들 쉬는 휴일에, 자신들이 각자 1만5천 원씩을 갹출해 물감을 사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막마을 버스정류장 벽화그리기에 참여한 이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좋은세상 만들기 대표인 정수(34)씨는 한국화를 전공하고 지금은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승재(34)씨는 청소용역사업을 하고 있는데 벽화 그릴 시설물 청소나 마을청소를 무료로 해주고 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허진(27)씨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지금은 광주민족미술인협회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다. 오은영(26)씨는 대학에서는 판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쇼핑몰을 운영하며 벽화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김강(25)씨는 한 시골초등학교 교사다. 그는 미술전공을 하지 않았지만 벽화작업에 그 누구보다 열성이다.



김종원(29)씨는 현재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그의 꿈은 훌륭한 사진작가가 되는 것이다. 김원(34)씨는 고등학교 미술교사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미술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김영인(28)씨는 전남대 학생이자 한 공익광고에 출연한 광고모델이기도 하다. 정일영(26)씨는 유통관련 일을 하다가 지금은 아예 이 단체의 아트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오은영씨는 "판화작업을 할 때는 내 감정 위주로 작업을 하고 또 내 작업 나름대로 즐겁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과 소통하면서 함께 작업하는 것도 혼자 작업하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며 소감을 밝힌다.



김종원씨는 "평소에 벽화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특히 마을버스 정류장에 벽화작업을 할 때는 작지만 도시와 농촌 간에 교류가 이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다"고 한다.      



허진씨는 "대개의 미술작품은 갤러리에 와서 봐야 하는데 내 손길이 닿은 작품 하나가 시골 한가운데 있어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벽화작업은 다른 작업과는 달리 여러 사람의 다양성이 녹아 있고 또 다른 작품에 비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아 좋다"고 작업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이들의 작업을 하루종일 지켜본 농목마을 전 부녀회장 유성복(53)씨는 시원한 수박을 내오며 "다른 동네 버스정류장이 예쁘게 꾸며져 있는 걸 보고 괜히 부러워만 했었는데 이렇게 우리 마을까지 와서 벽화작업을 해주니 너무나 기쁘다"며 청년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밭일을 갔다오다 들른 임이순(68) 할머니는 "자기 동네도 아닌데 남의 동네까지 와서 이 더위에 고생을 해주니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좋다"며 "시원한 물이라도 갖다줘야 할 것인디…"하고 흐린 말끝으로 진한 고마움을 전했다.



청년들이 봉하마을로 추모벽화 작업하러 가는 까닭은....


▲ '좋은세상만들기' 회원들이 아침 9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을 해서 이쁘게 새단장을 시킨 광주 농막마을 버스정류장.  
ⓒ 이주빈  


▲ 농막마을 버스정류장 무료벽화작업을 마친 '좋은세상만들기' 회원들이 손을 흔들며 기뻐하고 있다.  
ⓒ 이주빈

한편 이들은 조만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와 위패가 있는 경남 봉하마을에 가서 추모벽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이들은 이미 지난 5월 30일 봉하마을로 답사를 다녀왔다.



봉하마을 추모벽화 작업을 제안한 허씨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내 삶에만 집중했었는데 노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고 나서 그분이 가진 생각과 가치관, 사상에 대해서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에 많이 후회스러웠다"며 "이제라도 그분의 뜻을 공부하고 이어갈 수 있는 방법 중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이고 벽화여서 이를 통해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수 대표는 "봉하마을 작업은 현재 2박 3일로 예정하고 있으며 광주전남지역에서 약 25명의 자원봉사단을 꾸려서 갈 것"이라고 밝혔다. 정 대표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벽화 작업은 고인에 대한 추모도 있지만 고인의 정신을 희망적으로 계승시키는 데 작품의 방향성을 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전남지역에서 마을벽화 했을 때처럼 작은 규모가 아니어서 지금 물감 등 재료비용, 교통수단, 현장에서 숙식해결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알아보고 준비하고 있다"며 "준비가 끝나는 대로 봉하마을로 달려가 추모벽화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로 광주전남지역에서 시골마을에 무료벽화를 그려온 '아름다운 청년들'이 노 전 대통령의 숭고한 뜻을 희망으로 계승하겠다며 봉하마을로 찾아갈 예정이다. 이 청년들의 순박한 마음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질박한 미소로 답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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