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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10년~2019년대 자료

[부산민미협정기기획전] 국민국가의 안팎(1)―단바로 간 작가들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2. 7.

국민국가의 안팎(1)

―단바로 간 작가들

 

전시 이유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말 그대로 ‘도둑’같이 찾아왔다. 해방의 기쁨은 순간이었다는 당대의 여러 진술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해방이 새로운 국가건설에 곧바로 귀착된 것은 아니었으며 제국의 붕괴와 이를 대체했던 미군정의 지배구조는 식민지 이중도시에 또 다른 모순들을 결절시켰다. 해방이 도시적 공간과 삶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것은 무엇보다 제국의 영토적 붕괴에 따른 엔블록의 급속한 위축과 고도국방국가로서의 광대한 영토가 기왕의 민족적 단위체로 분할되면서 생기는 집단적 이동의 문제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제국 일본의 지정학적 변화는 식민지 치하에서의 영토적 경계를 이동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를 노출시켰고 이에 따라 조선을 떠나 이주를 감행했던 조선인들의 위치에도 심각한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는 제국 일본의 패전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로 귀착되는 게 아니라 제국 일본의 다양한 식민지로 이주해야 했던 조선인들에게도 아주 중대한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는 의미이다. 일제 하에서 광범위한 이동을 경험했던 조선인들은 크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구직 도일, 둘째 구직자의 가족으로서 구직자와 동반 도일하거나 구직자가 취업을 한 후에 초청하여 도일하는 가족 동거 도일, 셋째 진학 또는 면학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 도일, 넷째 뚜렷한 목적 없이 경험삼아 행하는 만연도일, 다섯째 총동원 정책으로 일본의 전쟁에 동원된 집단도일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첫째, 둘째, 다섯째의 경우 해방 이후 대거 조선으로 귀환하게 되면서 ‘전재민귀환동포’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들의 귀환은 해방이라는 기쁨과는 무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해방이 상실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근거이기는 했으나, 이 행위가 ‘국가’의 영토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다른 한편으로 귀환자들이 ‘국민’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들은 조선 내부에 거주하는 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위치에 서 있어야 했는데, 이 과정이 신생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자질로 활용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귀환자들이 당대의 명칭과 구별해서 아직 국민은 아니지만, 그러한 변별된 자질들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차원에서 ‘인민’이라는 규정을 할 수 있다면, 이들 인민들은 조선과 일본․만주․남방․남양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귀환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민족적 제의의 과정을 경유해야만 했고 자신들의 이동이 신생독립국가로 귀결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언표화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학도병으로 전선에 참여했던 청년들의 수기에서는 황군이 되어 남방과 남양으로 나아갔던 자신의 주체성 가운데 황군의 이미지를 탈색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으로서 위치를 표나게 강조하여 조선인이라는 순결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제출하기도 한다. 이는 에스닉의 차원에서 조선인이기는 하되 아직 국가에 소속된 국민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많은 수의 귀환자들이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이 돌아오는 행위에는 단순히 고향에 되돌아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에서 생존과 생계를 도모한다는 차원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만 했다는 것을 주목한다면, 이들이 귀환하면서 조선의 국민이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해방 이전에 이미 38선이라는 남북 분할에 대한 협상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진행되었다는 것도 문제적인 일이었다. 가령, ‘전재민 귀환동포 환영’과 같은 수사가 오래 가지 못하고 미군정의 남한 경제정책의 실패와 미곡계획에 따른 식량부족은 대규모 실업자와 기아 상태를 속출시켰고 이로 인해 귀환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양산했다. 남한 산업이 실질적으로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귀환자들은 도둑이나 강도로 몰리거나 매춘부 등 부도덕한 존재로 의미화되면서 향후 국민국가 건설에 있어서 갖추어야 할 건전한 국민성으로부터 이탈되어 있는 존재로 지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태는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에 연합국사령부(GHQ)를 설치한 뒤 일본의 국가 경계를 어느 정도 확정함으로써 조선의 국가적 영토와 영해가 설정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의 붕괴가 국가 간의 엄격한 경계를 확정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조선으로 되돌아오는 자의 위치는 조선 내부 거주자들에게 일종의 위험의 표지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총력전 체제기 ‘대동아’가 침묵의 단어가 되고 ‘태평양’이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영토의 중요성만큼 영해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감각하기 시작했지만, 총력전 시기 아메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바다’를 통해 ‘자유’와 ‘민주’의 이미지로 구축하면서 냉전블록을 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구조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여, 조선 이외의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도항을 했던 조선인들의 귀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조선의 현실적 조건과 사정으로 인해 귀환을 포기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해당 지역에 고스란히 정착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GHQ가 일본에서 1946년에 공포한 ‘외국인등록령’에 따라 조선인들은 외국인으로 분류되고 귀환할 경우 최소한의 재산만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즉, 재일조선인들이 귀환을 포기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 북한지역 출신이나 재소자들의 귀환은 허락되지 않았고 미귀환자들이 송환되기 위해 몰려든 항구에는 귀환자를 위한 시설이나 의료, 식량 문제 따위를 일본 정부나 GHQ가 해결하지 않아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경제나 산업시설의 부재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급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환자들은 다시 일본으로 밀항을 거듭 시도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전쟁 시기에서도 그치지 않고 이루어지는데, 이들 중 적발된 자들은 수용소에 이감되어 다시 송환되었다. 해방 이후 1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귀환하거나 밀항을 거듭했으며 이 과정에서 송환되기도 하고 정착하는 등의 복잡한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전시는 이러한 역사적 삶의 과정들에 놓여 있는 삶을 성찰하고 이를 예술적 대상으로 삼아 전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이들을 예술적 대상으로 간주한다고 해서 전적으로 관찰하는 자의 위치에서만 이들을 포착하는 것은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문제들을 함께 사고해야 하며 동시에 이를 표현해야 마땅한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이라는 국가 내부의 영토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포착하는 작가들의 작업이 동시적으로 전시될 수 있을 때, 단바로 간 작가들의 작업이 국민국가를 이상화하거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것으로 의미화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전시는 두 개의 층위를 분할하되 그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큐레이터_ 김만석

단바 망간기념관 관련 전시를 국내 처음 열어 봅니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작가들의 여러 생각들을 보시길~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50940.html
*본 전시는 이와 관련 취재를 원하시는 작가와 기획자들과
정보공유를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많이 찾아주시길~
http://blog.naver.com/kkarak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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