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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안내/2001년~2009년 전시

김미혜 개인전 추가(평론과 작품사진)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9. 29.






침묵으로서의 리얼리즘
-김미혜의 근작-
박응주(미술평론가)
풀 · 밭
그는 ‘풀밭’에 대한 애착(집착)이 있다. 그의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본 그것은 황갈색의 대지의 은총(<예찬>2001)이거나, 푸르름이 배어날 듯한 인간과 대지의 질료적 동질감(<풀잎처럼 눕다>2000)이거나, 가뭄 끝 푸석한 검불로 흩날려가고 있는 박토의 부초浮草(<노숙>2000)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풀밭’을 인간과 그 삶을 떠받치고 있는 자연의 건강성에 대한 일종의 척도로 사용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 작품들에 전반적으로 드러난 척박한 회갈색의 풀밭은 사실상 자연으로서의 회생가능성이 엿보이지 않은 죽고 썩어가는 풀, 죽음충동으로서의 타타토스에 가깝다는 문학적 풍유로 해석할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게다가 비록 ‘죽어가는’ 형국이나 이악스런 생장은 더욱 ‘왕성한’ 악마적인 속성마저 숨기지 않고 있다는 데에서는 풀은 이제 단순한 문학적 배경이기를 그치고 ‘형태’의 지위를 넘보는 데까지 이른다.

이는 유기적 자연으로서의 최종의 희망마저 좌절된 총체적 삶의 조건에 대한 파탄으로 읽는 모던의 파탄, 리얼리즘적 확신의 고갈에 연대하고 있는 그의 이념으로 보아낼 수도 있으리라. 그것은 성욕의 파탄, 식욕의 파탄, 권력(욕)의 파탄이다. 즉 상징계의 자명함의 고갈(<어떤 한낮>)이며, 육체적 영토화로서의 식욕을 넘어가는 분열(<이후에 오는 것>)이며, 궁색한 진보라는 도저한 역사에의 회의(<영구적인 재활용 의자>)로 읽기에 우리는 아무런 부족함을 못느끼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그는 죽음이나 파탄 혹은 염세적 회의라는 대 전제를 책상 앞에 걸어놓고 나서 작품은 이제 그 징후의 기록이거나 비관적 세계의 표현이거나 한 듯이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예컨대 미술을 근거지우는 것으로서의 역사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담론 혹은 그 무엇이 ‘부재원인’으로서 존재하는 꽃밭에서 이후의 모든 ‘꽃들’은 그 부재원인으로부터 피어났다고 하는 알튀세르식의 역사인식이 미술비평의 틀로 전사되는 사태를 우려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인식등의 인식일반과 예술인식과의 일정한 변별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예술은 ‘약호화 되지 않은 사건의 소리 없는 현존’이라서 ‘그 내용’만의 ‘형식’이지 않고 때로 그 내용을 위반하고 벗어나고 빠져나가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둘 필요이다. 지극히 개별적인 일화에 대한 차용, 특정 사건에 대한 감정이입의 방법들을 사용하되, 그 기호들의 지표(index)의 불안정성, 지표적 표식 작업의 불가능성을 차라리 겨냥하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는 김미혜의 작업에서 배경의 형태로의 월경越境을 읽는 곳이 이곳이다. 구체적이고 통합적인 장소의 현존에 기호의 지표적 근거를 둘 수 없는 그것은 바야흐로 기호의 알레고리적 재배열에로 진입한다.

<어떤 한낮>을 보자. 우선 세 개의 거대한 침대가 보는 이의 목에 걸린다. 그것은 삼위三位로서의 어떤 무엇을 환기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은 아닌, ‘욕망 죽음 희생’의 짝패 같은. 뭔가 불건전하고 ‘아래’를 향해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지표들이다. ‘침대’는 이미 관棺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울’해 보이는 것이다. 인물들 역시 어딘가 음산하고 폐쇄적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특정한 상황을 설정하지 않으면서 ‘걸쳐있다’. 침대에서 요람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애도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갈망으로까지. ‘오필리아의 죽음이 햄릿으로 하여금 다시 그녀를 갈망하도록’ 만들었듯이 애도의 대상은 가닿을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미친 듯 불타오른다. 그리하여 애도의 대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과도한 기표가 된다. 근원적인 결핍을 메울 수 없는 욕망의 도식은 이처럼 대상을 허구화시키는 상징계의 붕괴를 필요로 하며 상상계의 문턱으로 재진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주체는 거칠고도 잔인한 학대(윤흔輪痕이 선명한 대지大地에 대한 가학증)와 애도로서의 끓는 욕망(웅크린 소녀의 항문기적 퇴행)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무수한 반복을 일으키는 탈중심화, 즉 실재계에 난 구멍 때문이다. 그것은 ‘지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현시顯示로서의 것으로밖에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하는 한낮, 사물들이 모두 제자리를 차지하면서도 또한 제 현존을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 이유가 그것일 테다. 그는 욕망의 동인 ‘오브제 a’를 광막한 대지, 죽음의 잔영인 ‘풀’들로부터 길어오고 있다. 그것은 곧 풀의 죽음이다. 궁색한 ‘하늘’은 그런 ‘시계視界 0도’로서, 최소한 ‘시계의 궁벽함’이라는 이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의 한 예화일 것이다. 우리는 이를 외상(trauma)이라 부를 것이다. ‘아버지(Farther's law)’의 죽음일수도, 억압으로 남은 성본능의 영속하는 장애일수도, 보다 비약한다면 김수영의 ‘풀’의 죽음일지도 모르는 어떤 ‘고착 강박신경증’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의 선분이 진행되지 못하고 ‘표면’에서 회절, 순환하는 지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시뮬라크라한 ‘표면’이다. 우리는 이 외상적 리얼리즘(traumatic realism)을 주목한다.

외상外傷
이는 그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삶과의 연대로서 자신의 미학적 근거를 설정해왔던 노동미술의 한복판에서의 ‘변’화된 성찰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외견상 정치적 체념이라는 거대한 블랙홀로부터 생겨난 알레고리들에 적당히 의탁하면서 ‘지시하지 않기’라는 책략을 편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샹송풍의 이완된 무상한 정조는 길게 늘어져있거나 수풀사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인물상들을 통해 여실하게 드러난다. 가족 구성원인 듯싶은 식사를 막 끝낸 포식자들은 포만이후의 불쾌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각기 늘어져있다(<이후에 오는 것>). 도대체 욕망이란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한 생산처럼 생산성의 논리와 뒤엉키며 그 동일한 양상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축적이나 진보나 성장처럼 불가역적인 생산의 과정이다. 허기만큼이나 ‘죽이고 싶은 포만감’은 더 큰 허기를 낳는 듯이... 그의 정치적 체념은 물신숭배적 매혹이라는 이 미증유의 사태의 이면인 것이다. 실로 거대한 허기가 엄습해온다. 여기에서 그의 외상적 리얼리즘은 비로소 ‘노골적으로 지시하지 않기’라는 혐의를 조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구적인 재활용 의자>는 자폐증적인 반복행위로서의 의자/‘권력’의 데칼코마니를 보여준다. 그 의자는 이쪽에서 앉으면 저쪽이 등받이이고, 저쪽으로 앉으면 이쪽이 등받이가 되는 자동기계, 자동기술법(automatism)이다. 이미지나 꿈 등이 상흔으로 남은 상처는 끊임없는 반복행위로서의 강박증을 불러와 실로 다다이즘적인 자폐(autism)의 허무주의를 유포하기에 이른다.

한계수위까지 꽉 차오른 ‘견딜 수 있음의 없음’(<어떤 한낮>), 실로 간소한 음식에도 구토에 이르는 ‘복부 팽만감’(<이후에 오는것>), 단조롭게 의자나 까딱대며 노는 놀이만으로도 하루종일 즐거울 수 있는 편집증후군(<재활용 의자>)의 표상인 셈이다. 이는 명백히 죽음충동이다. 이렇게 ‘한낮 속에 서있어’도 끝내 보이지 않은 느낌이 숨어있을 수 있음, 백주의 작열하는 햇살 속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린 한 편린의 진실도 건질 수 없도록 운명지어져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닦아세워짐(das Gestell), 닦달당하는 내몰림을 ‘황폐한 아름다움’으로 그는 찬양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죽어야할 운명임을 뻔히 알고 있는’ 체념과 닦달당하면서도 내딛는, 앞으로 나서는 한 걸음의 순간만을 주목해보자. 그것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결정, 결단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죽어야할 운명임을 고스란히 알면서 하나의 결정을 하는 자의 모습’에 가까울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 촌각의 지점만이 그가 주체를 등록하는 곳이다. 이처럼 그의 이념은 무상함에 관한 바로크적 알레고리를 한 편으로, 또한 세계가 주체에 선재先在함으로 운명지어진, 모든 방향에서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주체의 상실을 넘어, 실재적인 것을 현존시키려하는 또 다른 한 편을 축으로 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이것이다. 과연 ‘사건’을 현존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때 ‘사건’이란 그 자신의 고동치는 욕망, 그 욕망의 영광과 공포 가운데서도 상상계와 상징계의 적당한 거래를 끝내 거부할 때까지 하여 그 무상함을 영원성으로 끌어올려보려는 갸륵한 숭고와 같은 상태, 그리하여 원인과 목적이 동시에 정당화되는 그런 상태를 말함이다. 이는 물론 그가 현재 손목에 차고 있는 한반도적 지금 이곳을 가리키는 시계와 무관할 수 없다. 삶의 수습의 국면이 아니라 영원한 해체의 과정, 삐그덕거리고 아퀴가 맞지 않으면서 그러면서 지나가야만 하는 세월로서의 역사의 죽어가는 얼굴의 풍경이 그것이다. 지독한 필멸必滅, 죽음의 불가피성, 영생의 불가능성이다. 사물의 왕국으로서의 바로크는 ‘폐허’였지만, 역시 사물의 왕국으로서의 현재는 모조와 속임수로서의 시뮬라크르들의 세계인, 폐허보다 더한  ‘황폐한’ 추醜인 것이다. 이는 완벽한 단절의 계기를 내포한다. 이 단절의 계기와 그가 현존시키려하는 사건은 긴밀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가정을 설정하려한다. 그것은 ‘시각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이다. 이는 모더니즘이 감각들의 분리를 주장하면서 시각적 영역에서 쫒아냈던 것들로서의 시간과 계열적 연속의 기능들, 예컨대 일시적인 것, 청각적인 것, 산만한 것의 비가시적 감각들이 사실은 시각의 깊숙한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개념으로부터 빌어 왔다. 그러나 기실 시각적 무의식을 인용하는 진정한 이유는 김미혜의 작품에서 그런 공감각적 감각이 현현되었다고 기술하려는 의도에서보다는 시각의 그 깊숙한 내부에 자리하는(무의식의 층위) 어떤 모체(matrix)로서의 비가시적 체제가 놓여있다는 점이 분명한 사실로서 읽혀진다는 것이며, 이는 특이성이 배태되는 잠재성의 장이자, 전前 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장으로서의 사건과 표현을 사유하는 들뢰즈적인 사건의 존재론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는 소략한 가설 때문에 그러하다.  

나아가 우리는 조금 더 용기를 낸다면, ‘행(行)하나 알지(知) 못한 채’ 건너왔던 심연, ‘함정’이면서 동시에 그를 통해야만 건널 수 있는 ‘연륙교’같은 것으로서의, 어쩌면 이 단절의 계기가 없다면 작품은 여지없이 가상으로 전락하여 그릇된 총체상을 구현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것이었다고 표현해볼 수도 있다. 이는 곧 그의 그림이 총체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가상을 중지시키고 운동을 정지시키며 이편과 저편이 넘나들 수 없도록 깊은 심연이 파여 조화를 중단시키는 ‘표현 없는 것의 묘사’일 경우에만 그러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요약해보자. ‘시각적 무의식을 포함하는 총체’, ‘침묵만이 메꿀 수 있는 숭고와의 어떤 접점’ 이라고 말이다. 그러하다면 그의 것인즉 확실히 리얼리즘적 확신으로부터 이탈되어있는 ‘탈리얼리즘’의 방법임이 자명해 보인다.
‘총체’와 ‘침묵’, 그 불가피한 두 단어의 대치국면, 그것이 우리의 해명과제다.

침묵으로서의 리얼리즘
침묵, 그것은 우선 ‘소극성’이다. 적극적 수동성인 것이다. 이는 경제적 관계에 입각해서 정의되는 주체로부터 문화적 정체성에 입각해서 정의되는 주체로의 이동(변화)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대변환과 무관치 않다. 즉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편에 서기를’ 요구했던 한국 좌파예술가들에게서의 80년대적 정언명령이 일종의 내부적 균열, 혹은 미세한 궤도수정을 겪어야만 했던 90년대적 지형변화에서 직면한 문화적 타자의 경험인 것이다. 그 타자의 경험은 먼저, ‘테마’라기보다는 ‘기법’이요, ‘경향’이라기보다는 ‘위치’에 더 특권을 부여하는 미학적 인식론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위 노동자와의 동일시가 진행되면 될수록 환원적이거나 관념적인 잘못된 재현은 둘 사이의 간극을 더욱 확실하게 확인시켜주어 작가와 노동자, 혹은 미술가와 타자사이에서의 정체성상의 균열은 더욱더 분명해지는, 그리하여 이제 민중미술은 프롤레타리아의 ‘곁’에 자리만 잡고서 ‘이데올로기적 후원자’라거나 ‘존재적 전환을 기꺼이 감수한 노동계급의 은인’이라거나 하는 이미 과분해진 불가능한 자리를 ‘양심상’ 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태를 말한다. 관계적이고 환영적인 정치도덕적 형상원리들은 비위계적이고 즉물적인 배치와 해석으로 대체되어가는 미학사상적 변화들이 뒤를 이었음은 물론이다. 즉 이데올로기적 관념론의 미학적 상관물들이 비판되고 회피되어지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의 자리에 ‘공백’이 들어찬 것이다.

그의 ‘탈’리얼리즘은 이 공백이 대신 들어서 가리고 있는 형국, 그로선 억울할 수도 있는 ‘배신’의 낙인이다. 우리는 이 공백의 물리학적, 정치공학적 실체까지 해명해볼 수단은 갖고 있지 못하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는 (앞서 크라우스를 인용하며 붙였던 단서처럼) 소략한 크로키정도의 것 일텐데, 정치적 무의식을 뒤덮는 더 넓은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포장이 둘러쳐져 있다는 것, 표현을 갖지 못하는 표상체계의 미세하지만 심각한 고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지나갈 뿐이다.

표상체계가 무너진 자리, 그곳에 ‘정직한 눈’이 눈을 뜬다. 터널인가?, 혹은 기나긴 다리의 교각아래의 정경인가?, 군상들이 우글대는 묵시론적 풍경에는 빛의 점으로서의 소실점인 응시의 점에 마냥 내맡기지만은 않은 ‘나’의 시선의 마중나감이 있다(<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장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듯한’ 시간의 진행을 몰아올 원근법적 구조 그 안에 놓여져 있는 ‘실재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듯한 ‘평화로운’ 정경이 그것이다. 이는 빛의 점 그 너머의 실재적인 대상, 이른바 주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그 배후의 것이 탈현실화한(‘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외관으로서의 리얼리티라는 ‘스크린’을 만나 (여러분이 보시다시피의) 유동적인 ‘표면’에 머물고 있는 ‘평화롭지 않은’ 정경 이것이기도 하다. 마치 현상학적 판단중지의 순간과도 닮은 이순간은 눈(eye)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망스런 자포자기의 상태이다. 외상적 실재가 미처 덮여지지 못한 채, 즉 실재적인 것을 상기시키지 않은 데에 실패한 채, 마침내 그것은 외상적 환영주의를 표방하고야마는 것이다. 이 환영주의를 ‘말言’로 볼 수 있다면, 이 회화의 총체는 ‘강요된 침묵 속에서 강요된 말’쯤이 되리라.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수동적 환영주의임을, 또는 최소한 외재적인 지점에서 시각적인 것을 공격하는 모던의 유토피아적 야망의 투사는 아닐 수 있음을 확인한다. 그곳은 무수한 모순들이 공존하는, 즉 조정 불가능한 상황들의 동시성을 함께 창조할 수 있는 작용들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외상적 실재는 외상적 환영으로 전화하고, 조정불가능한 다양성은 단일한 다면성속에 포함된다. <어떤 한낮>에서 ‘욕정/휴식’으로서의 바로 그 침대에서 항문기적 ‘배설’은 이루어진다. 그 동시적 욕망의 외피는 생식기적-남근기적이면서 또 동시에 사디즘적-항문기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의 ‘실재’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보다 즉물적인 진상眞相을 보고 싶다. <오래된 낙하>는 실로 ‘비非형태 의지’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것은 색을 칠한 게 아니라 벗겨낸 자국에 불과하다. 또한 추락하는 두 인물이 묘사되어 있기는 하나 그마저 천을 오려붙여 채색을 가한 후 뜯어낸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폐비닐봉지를 묘사한 것은 추락하는 자들을 포함한 화면을 무중력상태로 몰고 가기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일 뿐일 것이다(이로써 추락은 ‘비상’일수도 있어 보인다). 여기에서 ‘추락’은 전혀 ‘슬픈’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중립적’이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무정부주의적이라고 해야 옳다. 부유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따라서 ‘점의 상실’, 척도의 부재, 문화적 진공이다.

이제 그의 화면에 ‘인간’이 사라진다. 아니 ‘눈물 없는 인간’이 있다. 일체의 인간주의의 정조가 삭제된 ‘당당한 슬픔’을 가진 인간의 길(<오래된 길>)이 놓여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걸어왔음이 분명한 우연하고도(추상표현주의적 물감의 ‘흘림’을 통한 묘사를 보라) 필연적인(폐비닐봉지가 상징하는 문화文化와 대지사이의 부력浮力을 보라) 시계 제로(Zero)의 길이 그러할 것이다.

봉분인 듯 둥그스름하게 솟아난 대지에 꽂은 예리한 <몽환적 ‘살인’>은 따라서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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