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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협 아카이빙/2000년~2009년대 자료

컬처뉴스, '예술인복지, 이제 다시 시작이다'

by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2020. 11. 28.

[기자의 눈]예술인복지법 논의에 대한 기대




▲ 예술인복지법 제정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이러한 논의가 예술인들의 권리에 대한 인식확장을 일궈내길 기대해 본다.

1.
2005년 구본주 소송사건이 벌어졌다. 한 촉망받던 조각가의 사고사에 보험회사가 이윤을 이유로 무직자 취급을 한데 대해 문화예술계가 한 목소리로 대처했던 사건이다. 결국 이 사건은 보험사가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면서 예술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은 한 사례로 남게 됐다. 그러나 당시 구본주 대책위 활동에 관여했던 이들은 이후 유사한 소송에 휘말린 예술가들의 연락을 수 차례 받으며 고민에 빠졌다. 소송의 전말과 대응논리, 관련서류들을 꼼꼼히 챙겨 건네줬지만, 구본주 작가 만큼의 지명도가 없는 예술가들이 별다른 사회적 지원 없이 보험사와 일대일로 마주해서 예술의 가치를 옹호해 내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꼭 소송만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예술가들의 복지는 사각에 놓여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은 몇몇 유명인사를 제외하면 무직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 일쑤다.

2.
2007년과 2008년 초반까지 몇몇 예술단체들이 모여 예술인복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영화산업노조가 일군 성과들에 대한 확인에서부터 프랑스와 독일, 미국을 비롯한 해외사례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례들을 검토하고 지금 현실에서 어떤 정책들을 제안해야 예술인복지를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 논의들은 ▲문화부예산 1% 이상을 문화예술인 복지제도 구축에 투자할 것 ▲문화예술인들이 4대보험이라는 사회안전망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전담기구를 설치할 것 ▲문화예술인들의 신분을 보장할 것 ▲문화예술 실업급여제도를 도입할 것 등을 비롯한 7대 요구사항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바탕으로 가칭 ‘문화예술인복지연대’를 전체 문화예술계에 제안하고 논의를 모아 정책에 반영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워크샵과 토론회, 대선정책 제안 등 유의미한 활동을 진행했음에도, 문화예술계 내에 전면적인 논의구조 확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3.
11월 26일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은 ‘예술인복지법 제정을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 개최의 요지는 예술인복지 대한 근거를 법으로 규정해 예술인들도 사회복지제도의 틀 안에 포괄할 수 있도록 정책의 방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토론회에서는 예술인복지의 필요성에 대한 발표와 함께 구체적인 법안에 대한 제안, 법을 제정하기 위한 전략적 행동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재단측은 문화예술계의 논의의 장을 확산하기 위해 2009년에는 정례회의를 통해 좀더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 갈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법은 사회구성원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창구일 것이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흔히 이해관계 상충에 대한 조정노력이 실패했을 때 나온다. 예술인들이 저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술인복지에 진전이 없자 ‘법대로 하자’라는 말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는 그만큼 예술인들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통로가 협소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숱한 논의와 정책제안과 호소들이 있었지만, 결국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하는 반쪽짜리 예술인공제회마저 아직 제자리걸음인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4.
그간 예술인 복지에 대한 내용은 가난과 생활고로만 이슈화됐다. ‘예술가의 한 달 수입이 30만원을 넘네, 못 넘네’라는 소문들은 해마다 언론지상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불쌍한 사람들’로 인식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예술가들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 역시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복지혜택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예술인 복지에 대한 접근은 시혜성 정책이 아닌 권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간 오래도록 유포되어 왔던 예술가에 대한 왜곡된 인식들을 바꿔내야 한다는 것이다. ‘고주망태가 되어 가정을 팽개치고 예술혼에 불타오르는 괴짜 예술가’ 상은 이제 걷어낼 때가 됐다. 예술가들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역시 사회의 일원이자 생활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더 이상 자기세계에 갇혀 자폐적인 예술 활동만을 일삼는 것은 멈춰야 한다.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한 예술가상이 여전히 사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수록 사회와 소통하는 노력은 더더욱 절실한 것이다.

5.
구체적인 필요가 조직되지 않으면 일의 추진력은 생기지 않는다. 앞에 언급한 '문화예술인복지연대'의 활동이 한계를 보였던 것 역시 구체화되지 못한 예술계 내부인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예술인복지법’은 그간 논의되어 왔던 예술인복지에 대한 논의들을 집약적으로 제기할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법을 만드는데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논의과정에서 예술인들이 권리에 대해 구체적인 인식의 확장을 일궈내고 예술계 내의 담론이 풍부해지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물론, 예술인복지법이 실현된다고 해도, 법 자체가 종착역이 될 순 없다. 법은 예술인복지를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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