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대신 붓 들고 ‘썩은 양심’ 쏘다
안창홍 ‘시대의 초상’전
2년 전 폐암수술 뒤 목숨 건 창작
‘근대화 열매 누가 차지했나’ 따져
“시대와 동떨어지면 화가 아니다”
» ‘안창홍:시대의 초상’전에 나온 안씨의 근작들. <베드 카우치 1>
역사는 무엇인가. 당신은 역사를 무엇이라고 믿는가. 진짜 역사를 누가 어떻게 쓴다고 생각하는가. 철 지난 듯한 과거 한국인들의 사연 담긴 사진들을 소재로 작업해온 민중미술 작가 안창홍씨가 새삼 묻는다.
‘기모노를 입은 박영도-장연홍’. 그들은 왜 홍등가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을까. ‘정신대’로 끌려가지는 않았을까. ‘단기 4283년 1월 장년을 마지한 친우들’. 흰 저고리-검은 치마 차림으로 1950년 1월을 기념했던 그들은 ‘3년 전쟁’을 어떻게 났을까. 넓은 칼라 가죽점퍼를 입은 총각, 단추를 꼭 채운 흰 블라우스의 아가씨, 방금 미용실을 다녀온 파마 아줌마, 리본 달린 세일러복의 아이…. 1960~70년대 달동네 사진관 카메라 앞에 앉아서 증명사진을 찍었던 사람들. 셋방에서 연탄을 갈던 ‘공돌이-공순이’들이 만든 ‘근대화’의 열매는 누가 차지했는가.
작가 안씨의 관심은 자연사로 확대된다. 귀뚜라미, 나비, 날개 떨어진 잠자리, 차에 치여 죽은 뱀. 아니면 찌그러진 깡통, 한쪽만 남은 플라스틱 슬리퍼. 진짜 박물관은 공룡, 돌칼 따위가 아니라 이런 것으로 채워야 하지 않는가.
» ‘안창홍:시대의 초상’전에 나온 안씨의 근작들. <기념사진> 시리즈.
작가들은 다들 돈 되는 ‘꽃그림’이나 힘깨나 쓰는 자리로 옮겨가고, 그는 빈자리에 혼자 남아서 아직 시대를 그린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잠자는 장삼이사, 갑남을녀를 깨워내 역사 앞에 세운다. 모질게 사진을 찢고 긋고 일그러뜨리고, 검은 물 흘려 더럽히면서 작품을 만든다. 작가는 말하자면 주술사 또는 영매다. 박제된 사진 속 인물한테 새 생명을 부여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묻는다. 더러운 이름으로 역사를 도배해온 자는 누구인가.
2007년 암으로 한쪽 폐를 뜯어낸 그는 병원에서 나온 뒤 바로 붓을 잡았다. 그러다가 죽는다는 주변의 권유도 소용없었다. 흑백사진을 ‘카피’하느라 단조로웠던 눈에 모처럼 알록달록 호사 좀 하려던 계획을 바꿨다. 누가? 88만원 세대가 번듯한 직장을 꿈꾸며 표를 던진 엠비 정권이…. 촛불을 물대포로 쏘아 꺼뜨린다는, 4대강을 이어 운하를 만들겠다는, 다가구 소유자의 양도세를 없앤다는 현실 앞에 눈감을 수 없었던 것.
주름투성이 이웃집 농부 김씨, 사진을 압수 당한 포르노 사진 작가, 전신이 문신인 맥줏집 알바, 늘씬한 여성 모델 에이치, 뱃살 두툼한 음식점 여주인…. 이들은 벌거벗고 베드카우치에 누워 관객을 응시한다. 그림은 가로 4미터. 실제 크기보다 더 큰 그들은 그림 속에서 느긋하다. 나의 벗은 몸을 보라고! 그 어디에 관능미도 없고, 훔쳐보는 재미도 없다. 당당함과 숭고함에다 육체의 향기까지 풍겨나온다. 그리고 권한다. 당신도 벗어보라고. 작가는 시간이 축적된 몸이 바로 역사라고 말한다. 그의 자화상도 누드다.
꾹 다문 입, 정면을 노려보는 눈매의 그는 붓을 총처럼 움켜쥐고 있다.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품이 관객의 얼굴에 붓질을 할 태세다. “나는 화가”라는 당당한 주장이다. “시대와 동떨어진 화가는 화가가 아니다. 무엇이 두려운가. 핍박? 굶주림? 두려운 것은 양심을 파는 것이다. 그 두려움이 내 그림의 에너지원이다.”
» ‘안창홍:시대의 초상’전에 나온 안씨의 근작들. <기념사진> 시리즈.
그는 미대를 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고 믿었고, 기성 화단에서 더 배울 게 없다고 봤다. 부산에서 화실을 했다. 진학률이 높아 인기가 치솟았다. 막상 돈을 긁을 무렵 문을 닫았다. 화가는 그림을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서울로 올라와 도시의 썩고 문드러진 모습을 똑똑히 보고 양평으로 숨어들었다. 그게 벌써 20년이다. 쉰여섯 나이에 스물다섯 차례 개인전. 모두 초대전이다. 팔기 위한 전시는 하지 않는다. 작가는 “배고프지 않냐고? 적게 먹으면 되지 무슨 걱정인가”라고 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안씨의 작품전 ‘안창홍: 시대의 초상’은 2000년대 이후의 대표작과 근작 140점을 모아 보여준다. 베드카우치, 가족사진, 자연사박물관, 헤어스타일 컬렉션, 사이보그, 얼굴 연작과 49인의 명상 그리고 자화상 등이 2층 대전시실을 꽉 채웠다. 5월5일이 지나면 다시 차곡차곡 창고로 들어간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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